기술 한입

배의 크기는 바다가 아니라 운하가 정한다

by namddang

바다는 넓다.

이론적으로는 배를 얼마든지 크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선박은 바다 위에서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이는 운송 수단이다. 항로가 있고, 그 항로에는 늘 병목(Bottleneck)이 존재한다.

그 병목의 이름이 바로 운하다.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는 육지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이 지름길은 아무에게나 열려 있지 않다.

"이 배는 이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인가?", 더 상세하게는 "이 배로 화물을 가득 실어도 지나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선박 설계의 출발점이 된다.


선주들은 "이 배는 OOO 운하를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주문한다.

이 주문만으로 배의 폭(Beam)과 길이(LOA, Length overall), 흘수 (Draft, 물속에 잠긴 선체 깊이)가 정해진다.

바다의 넓이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운하의 폭과 깊이를 먼저 보고 배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이름들이 수에즈막스(Suezmax)와 파나막스(Panamax)다.


수에즈막스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선박이고, 파나막스는 파나마 운하를 기준으로 정의된 최대 크기 선박이다.

이름에서 선박 최대 크기와 무게를 알 수 있다.

수에즈 운하 위치 (출처:브리태니커)

컨테이너선으로 보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크기는 약 12,000 TEU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보는 컨테이너를 12,000개나 실을 수 있는 크기와 무게를 가진 선박이다.

반면, 파나마 운하를 기준으로 하면 약 5,000 TEU 수준이다.

같은 바다를 다니지만, 지나야 할 문이 다르면 배의 크기도 달라진다.


2016년, 파나마 운하가 확장되면서 Neo-Panamax라는 새로운 선박 크기가 등장했다. 컨테이너선 기준으로 약 14,000 TEU급이다.

운하가 커지면서 선박도 함께 커졌다.

파나마 운하 (출처: 브리태니커)

파나마 운하도, 수에즈 운하도 통과할 수 없는 큰 선박도 있다. 이들은 Capesize 선박이라 부른다.

케이프사이즈는 파나마 운하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에 너무 크기 때문에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이나 남미 최남단 혼곶을 돌아간다.

멀게 돌아가지만, 주로 철광석이나 석탄 등의 대량 원자재를 실어 나르기에는 그 편이 더 경제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기준 하나가 더 있다. 바로 DWT다.

DWT(Deadweight Tonnage, 재화중량톤수)는 선박이 안전하게 실을 수 있는 총중량을 의미한다. 화물만이 아니라 연료유, 식량, 예비품, 승무원 및 개인물품까지 모두 포함된 무게다.

이 DWT 역시 운하에 의해 결정된다. 운하의 폭과 깊이가 한계를 정하기 때문이다.


수에즈 운하는 약 160,000 DWT 이하의 선박만 지날 수 있다.

파나막스는 약 52,500 DWT, 네오 파나막스는 약 120,000 DWT 수준이다.

결국 선박의 크기와 무게는 바다가 아니라, 운하의 제약을 모두 만족시키는 최댓값으로 정해진다.


결론은 분명해진다.

선박 기술이 운하를 바꾼 것이 아니라, 운하의 크기가 선박 기술을 바꾼 것이다.


선박 설계 엔지니어는 넓은 바다를 보며 큰 배를 꿈꾸지만, 현실에서는 좁은 운하의 조건을 맞추어야 한다.


"바다는 넓은데, 왜 꼭 이 문을 지나가야 하지?"라고 물어본다면 그게 지름길이고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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