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의 역사 -6- 현대 기업 아이덴티티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BI와 CI의 그래픽적 스타일은 1950-60년 즈음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종결과 국제 관계의 형성, 제트기의 발전,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 형성된 자유무역은 세계화를 가속화시켰고, 기업의 해외 진출 또한 활발해짐에 따라 기업은 전 세계 어디나 문화에 상관 없이 통용될 수 있고, 영속적인 상징물로 활용될 수 있는 시각 언어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기업 아이덴티티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908년 선보인 AEG의 로고는 세계 최초의 기업 아이덴티티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 로고를 만든 독일의 디자이너 피터 베렌스(Peter Behrens)는 이전 아르누보 양식의 유려한 곡선과 식물 형태의 시각 언어와 결별하고, 벌집 모양의 육각형 틀 안에 AEG를 넣음으로서 다양한 사업 분야에 진출해 있는 AEG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인쇄물 광고, 제품 디자인, 건축물까지 통일된 디자인 철학으로 감독하여, 기업의 모든 접점에 일관된 시각체계를 적용했습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단순성에 기반한 상징성과 보편성의 추구는 현대적인 기업 아이덴티티(Corporate Identity) 개념이 처음으로 시도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기업 아이덴티티가 추구하는, 단순한 조형에 기반한 상징성과 보편성의 추구는 당대의 모더니즘 디자인 스타일이 지닌 목표와도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시대가 산업화에 저항해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화려함과 복잡성을 추구했다면, 바우하우스로부터 비롯된 모더니즘 디자인은 산업화된 사회 속에서 조각, 회화, 공예 등 모든 장르가 통합됨으로서 그 시대를 인정하고 보편적인 언어를 만들고자 한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발견된 원칙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단순성과 기능성을 추구하는 기능적 미학이었죠.
이러한 미니멀리즘과 기능주의 원칙은 전후(戰後) 시기 기업들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50~60년대 국제주의 디자인, 즉 인터내셔널 스타일(International Style)은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하여 그리드(grid) 시스템, 무채색의 절제된 색상, 깨끗한 타이포그래피로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디자인을 발전시켰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기업 브랜딩에 특화된 디자인 스튜디오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 생겨났습니다. 유니마크, 체르마이예프 & 가이스마, 울프 올린스, 시겔+게일, 토탈 디자인과 같은 브랜드 디자인 및 컨설팅 기업 뿐만 아니라, 폴 랜드, 밀튼 글레이저, 솔 바스, 마시모 비녤리, 오틀 아이허 등의 디자이너들이 활약한 것도 이 시기부터입니다.
이 시기에 거의 모든 아이덴티티에 사용되면서 글로벌화의 상징이 된 서체를 꼽으라면 헬베티카(Helvetica)가 될 것입니다. 1957년 스위스의 막스 미딩거와 에두아르트 호프만이 디자인한 이 산세리프 서체는 본래 “Neue Haas Grotesk”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다가 1960년 “Helvetica” (라틴어로 ‘스위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중립적인 디자인을 목표로 만들어진 헬베티카는 20세기 중반 가장 인기있는 서체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수많은 기업들이 로고와 광고에 채택하여 현대적이고 신뢰성 있는 이미지를 전달했습니다. 헬베티카가 어찌나 기업 아이덴티티에서 많이 쓰였는지, 이후 70년대에 디자이너 폴라 셰어(Paula Scher)는 이 서체를 월남전과 이를 지원하는 기업의 아이덴티티와 연관지어, 윤리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싶은 디자인이라고까지 칭하기도 했으니까요. 헬베티카의 중립성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여러 논란이 있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용하는 거의 모든 산세리프가 헬베티카에서 파생된 전 세계 거의 모든 언어에서 헬베티카는 산세리프 서체의 기준이자 모태 역할을 했습니다.
통일감 있는 아이덴티티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업의 노력은 시각적인 측면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1956년 건축가이자 산업 디자이너 엘리엇 노이스가 IBM의 디자인 자문 이사를 맡은 이래, IBM은 로고 뿐만 아니라 패키지, 그래픽, 전시회, 내부 공간이나 가구, 제품, 사옥 등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한 광범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습니다. 그 중에는 폴 랜드가 디자인한 아이코닉한 로고도 포함되어 있죠. 디지털 작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의 IBM 가이드라인은 상상 이상으로 풍부한 영역을 커버하고 있습니다. (https://www.itsnicethat.com/features/paul-rand-ibm-graphic-standards-manual-empire-editions-publication-graphic-design-180418) 지금도 IBM의 브랜드 가이드라인은 디자인 언어와 철학에 대한 규정으로서 그 어떤 기업보다 정교하고 풍부한 내용을 자랑하고 있고, 디지털 환경 속에서 정확한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시각 언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언어적으로는 1943년에 존슨앤드존슨이 만든 ‘우리의 신조(Our Credo)’가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오늘날 흔히 쓰이는 ‘비전 - 미션’ 형식의 선언 뿐만 아니라, 기업이 추구하는 철학 등을 포괄하여 조직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이를 문서화하여 직원 행동 강령이나 조직 내 행동 기준으로 삼은 최초의 사례입니다. 고객과 직원, 지역사회와 주주에 대한 책임을 언급한 존슨앤드존슨의 신조는 기업의 정체성이 단순히 명시된 언어를 넘어, 윤리적 조직문화와 직원의 행동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아이덴티티 체계는 1960년대 서양에서 대중화되고, 7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참 산업화의 빛을 보기 시작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1971년, 와세다 대학 디자인연구회 출신 나카니시 모토가 당시 서구권의 CI 개념을 ‘DECOMAS - DEsign COordination as a MAnagement Strategy’라는 이름으로 소개해 출판하는데, 이것이 우리 윗세대의 디자이너들이 CI 대신 사용했던 ‘데코마스’라는 용어의 시작입니다. 이 개념 역시 회사의 상표와 색상 등을 지정하고 집기와 봉투, 복장 등을 통일하는 CI의 개념으로, 1971년 마쯔다 자동차와 1973년 다이에 유통의 기업 브랜드를, 나카니시 모토가 만든 디자인 회사 PAOS가 정리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당시 아이덴티티, 즉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집단주의 성향의 일본인이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일종의 조직 우선주의 문화를 위한 디자인 전략으로 설명한 것이었죠. 데코마스 개념은 대한민국에 상당히 빠른 시기에 도입되었는데, 1974년 조영제 디자인연구소가 <OB맥주 데코마스 매뉴얼>을 내놓은 것이 그 시작입니다. 이 ‘조영제 디자인연구소’가 바로 얼마 전 50주년을 맞은 CDR입니다. 물론 일본식 조어인 데코마스라는 단어는 오래 가지 못했고, 80년대 들어서 대한민국에도 우리가 아는 ‘C.I(Corporate Identity)’라는 단어가 대중화되게 됩니다.
오늘날의 기업 아이덴티티는 언어와 시각의 측면을 넘어, 고객에게 어떤 서비스를 어떤 방식으로 제공해야 하는지, 직원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지,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 SNS 채널에서 어떠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어떤 음악과 사진을 선택하며 어떤 말투로 고객의 니즈에 응답해야 하는지에 대해 지시하는 말들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말은 개인이 가진 문화나 개성과 상관 없이, 그 회사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 것이라는 이미지로 우리 마음 속에 남게 됩니다. 기업이 규정한 이미지가 곧 개개인의 이미지까지 규정하는 것이죠. ‘상징’이 곧 ‘권력’이라는 시각으로 이 현상을 바라보면, 오늘날 가장 권력화된 상징은 기업과 상품에 있는 셈입니다.
* 이 글은 ChatGPT의 도움을 (조금 많이) 받았습니다.
출처
Ruben Pater, <Caps Lock : How Capitalism Took Hold of Graphic Design and How to Escape from It> (Valiz, 2023).
Ellen Lupton and J. Abbott Miller, <Design, Writing, Research: Writing on Graphic Design> (London: Phaidon Press, 1999), p. 177.
https://www.lentoagency.com/insights/the-bauhaus-movement-shaping-modern-design-and-business
https://en.wikipedia.org/wiki/Helvetica
https://computerhistory.org/blog/ibm-and-the-transformation-of-corporate-design/
https://sloanreview.mit.edu/article/when-it-comes-to-culture-does-your-company-walk-the-talk/
https://blog.naver.com/cdr2424/221792035079
https://brunch.co.kr/@designclass/3
Bastos, Wilson & Levy, Sidney. (2012). A history of the concept of branding: Practice and theory. Journal of Historical Research in Marketing. 4. 347-368. 10.1108/17557501211252934.
김종균. (2015). 1960~80년대 국내 일본디자인의 영향과 과제. Archives of Design Research, 28(3), 187-200. 10.15187/adr.2015.08.28.3.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