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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직구작가 Sep 05. 2022

도란도란 오손도손 살고 싶으신가요?

옥신각신 티격태격 살고 있으신가요?

 친정 아빠는 젊어서부터 발이 넓어 다양한 사람들과 알고 지내신 분이었다. 활동적인 분이기도 하시고 유쾌한 성격 탓에 주변에 사람이 늘 모이는 그런 분이시다. 아빠의 지인분들도 대부분 장성한 자녀를 두고 있고 때문에 아빠 친구 아들, 딸의 이야기는 물론 별로 궁금하지 않은 며느리와 사위들 이야기까지 자주 전해 듣는 편이다.

하루는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아빠가 말씀하시길

“요즈음 우리 세대에서 자식들에게 재산을 다 주면 굶어 죽고, 안 주면 맞아 죽고, 반만 주면 (더 달라는 성화에) 쫄려 죽는다더라.”

라는 말씀을 하셨다. 부부동반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라는데 씁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빌미를 제공한 쪽은 부모 쪽이니 자식들 이야기도 들어보면 불꽃 튀는 토론장이 되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우리 세대 혹은 더 젊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생각이 다 같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부모의 재산이나 유산에 욕심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 까닭은 학창 시절 아빠의 사업실패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데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그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두 가지다. 하나는 ‘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 다른 하나는 ‘재산만 상속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빚도 상속이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나의 바람은 부모님이 사시는 그날까지 부족하지 않을 본인들의 자산을 잘 운용하여 나의 삶에도 다른 형제간의 삶에도 무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평가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노후대책을 탄탄하게 마련한 노년의 삶은 그렇지 않은 삶에 비해 윤택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 아닐까 싶다. 두 동생들의 생각이 나와 같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큰 부담드리지 않고 대학, 대학원 과정을 마쳤고 (장학금과 학자금 대출도 스스로 갚았다) 친정 살림에 보태진 못했으나 결혼 과정에서 금전적인 부분에 부담을 드리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부모님의 경제와 나의 경제가 일정 부분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고 서로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집값이 천정 부지로 치솟은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경제력으로는 집을 구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전세든 자가든 부모의 도움이 없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이다. 때문에 집 마련과 관련한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나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집을 마련하는데 시댁에서, 친정에서 전액 혹은 부분의 지원이 있었고 감사함으로 끝나면 아주 훈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겠으나 그 지원으로 인한 상당한 문제들이 크고 작게 불거지면서 불화의 씨앗이 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봐 왔다. 


첫 번째는 누가 더 지원해주고 덜 지원해주었느냐의 유치 찬란한 싸움이다. 양가 도움의 비율이 같아도 달라도 문제가 생기는 것인데 시장에 물건 사러 가서 흥정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집 너희 집 따져가며 누가 더 많이 지원해줬는지를 놓고 진흙탕 싸움을 벌인다. 어차피 그 돈이 모두 부부의 돈이 아니라 부모의 돈인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왜 말도 안 되는 싸움거리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지 모르겠다. 더 밀어주고 덜 밀어주는 것이 사랑의 척도는 아닐 것이고 상황에 맞게 형편에 맞게 자식을 위해 그들이 좀 더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그 마음을 이해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인데 자로 재 듯 정확한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부부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두 번째는 금전적 지원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 생기는 싸움이다. 부모 도움으로 시작한 많은 부부들이 그렇지는 않겠으나 평수를 넓히고 동네를 옮겨갈 때마다 습관적으로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가정도 쉽게 볼 수 있다. 마치 맡겨둔 돈을 찾아오는 것 마냥 부모의 지원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쉴 새 없는 전쟁을 치른다. 그럴 거면 차라리 부모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게 나을 것 같다(그건 죽어도 싫겠지?)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모의 부가 그들이 경제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정 안되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이나 기타 재산을 처분하여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러할 것이라 말은 쉽게 하지만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두 번째 유형을 만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세 번째는 사후 서비스 문제이다. 결혼하면서 좀 도와준 걸로 생색을 낸다는 둥, (당시에 그 돈 없었으면 아무것도 못했을 거면서)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보태준 걸로 시짜 노릇하면서 귀찮게 한다는 둥, 이번에 도움받으려면 잘해야 하는데 벌써 스트레스라는 둥 정말이지 나도 며느리지만 어떤 뇌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이기적인 목소리들이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처가에서 받는 도움이 당연한 남편과의 불화를 이야기하는 여자들도 적지 않다. 지원받는 것은 당연하고 자식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는 마치 댓가를 치르는 듯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줘도 지랄, 안 줘도 지랄’이라는 말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친정 아빠 세대가 우스갯소리로 하시는 이야기는 그냥 흘려 넘길 가벼운 이야기가 아님을 알고 있다. 지금 우리 세대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그것을 우리의 부모 세대가 분위기를 조성한 것도 사실이다. 금수저 집안이 아니고서야 얼마나 여유가 있어 자식들에게 퍼주고 있겠는가. 하지만 호의가 계속되니 권리인 줄 안다는 말처럼 부모 자식 간에도 일방적인 지원은 어느 순간 당연한 것으로 고착되어 나중에는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나이는 서른도 넘고 마흔도 넘어 중년에 가깝지만 늙은 부모에게 재산이 있음을 그냥 두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말겠다는 생각을 어제오늘 사이에 했겠는가. 


우리 부모세대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라 역설적으로 자기 자식들에게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이동할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키웠다. 나는 비록 배움이 짧아 노동으로 가계를 꾸려 가지만 내 자식만큼은 고등 교육을 받고 번듯한 직장에서 고액 연봉자가 되어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부모 세대의 지론이었다. 이 사실에 반박의 여지가 없음을 부모 세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자식은 부모가 어려서부터 원하는 것을 대부분은 손에 넣게 해 주었기 때문에 부모를 도깨비방망이쯤으로 여겨 성인이 된 후에도 말하는 모든 것을 부모에게서 찾는다. 어려서 찾는 것은 문방구에 가면 살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성인이 된 후에 찾는 것은 전답을 팔고 빚을 내어야 줄 수 있는 것들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잘 살아야 내 마음이 편하다는 부모의 마음을 잘 이용해서 결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여전히 부모의 주머니를 탐내고 있다. 


잘 사는 부모도 형편이 좋지 못한 부모도 자식에게만큼은 절대적 약자라 자식이 이야기하면 어쩔 수 없이 내어주고 보태주고 줄 것이 없으면 쥐어짜서라도 마련해 보는 그 마음을 자식은 태어나면서부터 익히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두 아이를 둔 부모이지만 동시에 자식인지라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싶다. 


우리 부부는 결혼하면서 당시 22평 아파트 전세자금의 일정 부분을 시댁에서 도움받았다. 사실 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이라 너무 감사하고 죄송했다. 어려서부터 익히 잘 알고 지낸 사이라 불가피하게 시댁의 상황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주신 돈의 액수보다 열 배, 백 배는 크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남편은 대학 졸업 전에 취업하여 26살부터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객지 생활로 모아둔 돈이 없었고 나 역시 대학원까지 마치면서 실제로 직장생활을 한 기간이 짧아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전셋집을 보러 다녔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참 우리 용감했구나 싶다. 남편의 근면 성실함과 가능성을 보고 결혼했고 맞벌이로 열심히 살다 보면 차근차근 모아 전세자금 대출도 갚고 무리 없이 지낼 수 있다는 판단이 생겨 결혼을 진행한 것인데 생각지도 않은 지원을 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함이 컸던 것 같다. 만약 내가 당연히 도움을 주실 것이라 막연히 기대하고 있다가 금액이 예상에 못 미치거나 일절의 지원이 없었다면 결국은 서운한 마음을 품고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기에 감사함이 배가 되었고 지금도 그 마음에 변함은 없다. 내어주신 사랑만으로도 충분한데 시작하는 우리 부부를 위해 형편보다 무리해서 물질적으로 보태주신 그 사실이 내가 살아가는 동안 마음적으로 갚아야 할 감사한 빚으로 남아있다. 


나이보다 성숙한 사고방식이라고 칭찬을 한다면 학창 시절 의도하지 않게 힘들게 살아봐서 그렇다라고 답하련다.(아빠 미안, 아빠 탓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 시절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 고맙게 생각할게요. 아빠도 잘 살아보려고 그런 거 다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괜찮아요.) 내가 이룬 것이 내 것이고 그것이 오래간다. 


부모가 일궈준 따뜻하고 보드라운 온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면 닥치고 충성하라. 전국의 며느리들이 반기를 들고 욕한다고 해도 좋다. 자식 앞에서 약해지고야 마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용했다면 감사함을 표현하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공손함을 지녀야 한다. 댓가를 치르듯 물질적 지원에 대한 채무를 갚으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양심을 갖고 생각하고 말하라는 것이다. 사탕 하나 더 달라고 징징대는 세 살도 아니고 성인으로서 권리는 다 누리려 하면서 기본적인 의무는 하지 않으려 하는 스스로를 살폈으면 한다.


아들이든 딸이든, 며느리든 사위든 각자가 좋아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으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아직도 부모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말로만 독립을 이루고 정작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는 자연스럽게 부모에게 의지하려 하는 사고방식을 버리길 바란다. 부모의 재산에 숟가락 얹고 싶다면 입 닫고 최선 다해 충성하고 징징거리지 말아라. 그것이 아니라면 자기의 앞날을 스스로 개척해 보길 바란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고방식은 언젠가 본인 자식에게 돌려받을 부메랑임을 명심하라. 지금이야 아이가 원하는 것을 손가락 몇 번 까닥해서 집 앞까지 배달받고 마트나 문구점에 들러 구할 수 있겠지만 훗날 거기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주문할 때 우리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집 팔고 대출받아 내 자식 손에 쥐어주고 더불어 탄탄한 나의 노년도 마련할 수 있는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올 것이다.


양가 부모님이 엄청난 재산의 소유자가 아니고 남편과 내가 경제적 독립을 비교적 빨리 이루었기 때문에 쉽게 말하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부부 둘이라는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부부가 있어야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그것은 부부가 해결해야 할 것이지 부모나 자식에게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 혹시 살면서 부득이하게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남편에게 늘 이야기한다. 

“나는 흔한 말로 폐지를 줍게 되는 삶이 오더라도 당신과 함께 다니면 즐거울 것 같아.”

남편은 질색하지만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몸이 고단해도 마음이 편한 삶을 살고 싶고 내 고단함을 다른 누군가에게 옮기고 싶지 않다. 그렇게 살아보지 않아서 쉽게 이야기하는 거 아니냐고? 천만에. 나의 학창 시절은 충분히 어두웠고 힘들었고 잔인했다. 그래서 더 잘 알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구구절절 적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면 나의 친정 식구들 가슴에 돌이키기 싫은 상처가 덧나는 일일 테니 삼가야지.


‘도란도란 오손도손'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렇게 살고 싶었고 그런 삶을 꿈꾸어왔다. 살아보니 ‘옥신각신 티격태격’이 더 쉽다는 것을 알았고 ‘도란도란 오소도손’ 살기 위해서는 정말 열심히 노력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나의 부모님과 나의 자식들과 도란도란 오손도손 살기 위해 충성한다. 내 마음의 충성이 어디까지 가 닿을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시부모님이 베풀어 주시는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보면 아마도 잘 전달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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