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첫 번째 일기

2022년 6월 3일 금요일

by KIKI




슬퍼지려고 기린을 만난 것이 아닌데. 저녁이 되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둠 속에서 그의 어깨를 바라보고 있을 땐 조금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뭔가가 더 남아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더 보탤 것이 없는 감정의 제로 상태가 이제는 서로에게 전혀 거리낌이 없어서. 마치 아주 오래 기간 삶이 지속되어 속이 텅 비어버린 나무 안에 둘이 갇힌 것만 같았다. 그 안에 붙들려 어디로도 흐르지 못하고 나무와 동일한 상태로 굳어가는., 부질없음과 무기력의 상태.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그날 한낮의 그 방과 해질 무렵의 호수를 떠올린다. 함께 오르내렸던 호텔의 베이스먼트와 엘리베이터, 테라스로 이어지는 통유리창, 그 너머 호수 건너편의 밤 불빛들. 싱글톤과 쉬라즈 빈 병, 두 개의 와인잔과 과자 부스러기들, 그리고 늘 앞에 있던 기린. 어떤 하루와 또 다른 하루의 잔상들이 뒤섞여 떠오르고, 여러 날이 모두 한날인 것처럼 모호해지고 단순해져 버린 그날들.



그날 기린은 다쳤다. 종일을 함께 보낸 그날, 그 방에서였다. 그 방엔 볕이 유독 세게 들어서 블라인드를 창틀까지 내리고도 틈새로 삐져나오는 빛 때문에 여전히 실내가 훤했다. 그것을 내리려고 침대 옆 테이블을 밟고 올라섰다가 창밖으로 무심코 시선을 던졌을 때, 호수 위로 발광하는 물비늘 때문에 순간 눈을 질끈, 감았던 기억이 난다. 시야를 찌르듯 날카롭게 파고드는 빛이었다. 감은 눈 속으로도 주홍색 빛의 형체가 번져 들어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잠잠히 서 있어야 했다.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방이 여전히 밝네,라고 내가 먼저 말했고, 그러게, 하고 기린이 대답했다. 가려도 채 가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빛이기도 했을뿐더러 잘린 빛 토막들이 공간 전체를 흡수하고도 남을 만큼 크기가 작은 방이기도 했다. 그날 그 빛은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자욱이 남아 기억 속을 맴돌았다. 떠올리면 가장 먼저 비스듬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기린을 비추고, 다음으로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던 퀸침대와 탁상 두 개, 벽걸이 TV, 데스크와 의자, 간이 주방이 전부였던 그 방을 하나, 둘, 천천히 비추는 빛으로.



거의 한 달간 지속됐던 그 통증이 시작된 것도 바로 그날 아침이다.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내가 배를 움켜잡고 꼼짝을 못 하자 기린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난생처음 겪는 종류의 통증이었고, 강도가 워낙 세서 뭔가가 잘못됐구나 싶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갑자기 왜 그런지 기린이 물었으나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병원에 가자는 말에도 연신 고개를 저었다. 병원에 갈 수는 없었다. 아픈 와중에도 어떤 일들에 관한 부정의 확신들이 끊임없이 존재를 상기시키며 나를 가로막았다. 보다 못한 기린이 급히 약을 사러 나가고 나는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 수압을 가장 세게, 몸이 데일 정도로 뜨겁게 틀어 두곤 쪼그리고 앉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았다. 물줄기가 배를 거칠게 두드리는 동안에는 통증이 좀 덜한 듯했다. 그러나 물밖을 벗어나자마자 또다시 매섭게 밀려드는 통증과 열기로 인해 온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잠시 후 돌아온 기린의 양손에는 커피와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고, 주머니에서 진통제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도무지 가라앉을 것 같지 않던 통증은 그가 건네준 샌드위치와 약을 먹고 천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한 바탕 소동이 지난 후에 시곗바늘이 열 시를 향해 갈 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좀 나아진 듯 하자 기린은 난데없이 냉장고에서 소주 두 명을 꺼내오더니 홀로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어제저녁에 사 온 간식거리를 테이블 위에 잔뜩 부려 놓고서 정작 손은 대지도 않고 술잔만 계속.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를 둘러싸고 있던 단단함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걸 내편에서 확연히 감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평소 수다와는 거리가 먼 그가 쉬지 않고 내게 어떤 말인가를 쏟아냈다는 점에서 그랬는데, 그것은 대부분 과거 이야기였고, 이야기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몹시 사실적인 데다가 진실하기까지 해서 꼭 그 많은 말들을 뱉어내고자 술을 마시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한창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불쑥 멈추더니 "근데, 너 안 아파?" 내게 묻곤, 몸을 반쯤 기울여 내 배를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이 모든 일들의 반복이었다.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내게 아픈지를 묻고, 내 배를 쓸어내리는. 줄곧 몸에 미세한 통증이 남아있었으나 이상하게도 그의 말을 듣는 동안에는 그걸 인지하지 못했고, 그가 묻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가 아프냐고 물으면, 나는 그를 향해 배를 내밀며 아프다고 말했다.



한낮에서 오후로 넘어갈 때 기린은 완전히 취했고, 그리운 사람에 대해 말하던 중에 돌연 눈물을 보였다. 그가 우는 모습을 보는 건 두 번째였는데도, 그가 도무지 울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서, 그게 그리움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서 이번에도 처음과 같이 놀랐다. 그때 나는 그의 말을 아주 가까이에서 듣고 있었다. 손을 아주 조금만 뻗으면 그의 눈매를, 뺨과 입술을 어루만질 수 있는 거리에서, 그가 웃으면 함께 웃었고, 제 풀에 침울해지면 어깨를 토닥이며 그를 달래기도 하면서. 기린은 그리워하는 사람에 관해 '등 긁어주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완전히 잠들 때까지 묵묵히 자신의 등을 긁어주던 사람. 등 긁어주던 사람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우는 그가 작고 여린 소년처럼 여겨졌고, 순간적으로 벅차오르는 어떤 감정에 떠밀려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당시엔 그게 사랑일 거라 짐작했는데 지금 와보니 그건 일종의 연민이었던 것 같다. 사랑만큼이나 강렬하게 밀려드는 것. 그래서 사랑으로 혼동하기 쉬운 것.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직면하게 되는 진실이란 기린은 내가 감히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늘 다른 곳에 있다. 다른 곳으로부터 왔고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이 관계에는 사랑이 무르익을 계절이 없으며 애매하고도 위태로이 매달린 그 무엇 또한 결국엔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낙하하리라는 예감이 내가 곧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내게 눈물을 보이던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함께 있다고 나는 오인을 했다.



서로를 품에 안은 채로 잠시간 멈춰 있다가 나를 침대에 내려놓으려고 그가 먼저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포개진 몸을 지탱하기 위해 그가 한 손으로 간이 테이블을 짚자마자 제대로 고정이 안 되었던 간이 테이블이 무너져 내리면서 두 개의 몸도 함께 무너졌고, 그 순간에 그는 재빨리 자기 몸을 바닥 쪽으로 돌려 나를 보호했다. 반사적으로 바닥에 뻗은 손이 몸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꺾이면서 그의 무릎이 세게 부딪쳤다. 테이블의 철제 다리가 휘어질 만큼 강한 충격이었다. 부딪친 부위의 통증이 얼마나 심할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그의 몸부터 살폈다. 몸에 가해진 충격 때문인지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고, 손바닥과 정강이가 즉시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했다. 내가 괜찮은지를 묻는 질문에는 대답도 없이 내가 괜찮은지를 역으로 물었다. 난 괜찮아. 그럼 됐어. 나도 괜찮아. 하곤 절뚝이는 다리로 있던 자리로 복귀해 다시 술을 들이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친 사람은 정작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덤덤한 반면에 푸르게 멍이 든 살갗을 들여다보며 조바심이 나는 건 오히려 나였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가 다친 게 마치 불길한 전조라도 되는 것처럼. 상처투성이 몸…… 저 상처가 오래가겠다……. 지겹게 머물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내리 술만 마실 뿐이었다. 가끔 우연히 생각난 듯 다친 부위를 흘깃 보고는 마른 손으로 쓸어내릴 뿐이었다. 냉장고의 술병을 모두 비운 뒤에 그는 잠들었고, 깨어나서 잠시 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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