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기 Apr 04. 2018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이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모양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이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모양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스트릭랜드(Strickland지만 발음만 들으면 Strict Land 즉 엄격한 땅이다. 물로 상징되는 유기적이고 유연한 결합과는 정확히 반대편에 있는 명명이 아닌가.)로 대변되는 가부장적이고 폭압적이며 권위적인 체제에 맞서서 이 세상의 소수자들이 서로 힘을 합쳐서 사랑을 성취해가는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펼쳐낸 영화임이 틀림없다. 영화 속의 힘없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힘과 의지가 되어주는 훈훈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작업으로 바쁜 이웃에게 샌드위치를 나눠주고 지각하는 동료의 출근부를 챙겨준다. 심지어 저 남미 땅에서 온 괴생명체 양서류 인간에게도 달걀을 먹여주고 음악을 들려주며 서로 교감을 나눈다. 그리고 다른 존재를 부족하거나 불완전하게 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 그러나 영화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것도 인간 혹은 신 중심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낯설고 다른 존재는 남미에서 신 취급을 받다가 잡혀온 괴생명체 혹은 양서류 인간이다. 한국 영화 정보에서는 괴생명체라고 소개하고 있고, 원래 영어로는 Amphibian Man 즉 양서류 인간으로 되어있다. 영화에서 스트릭랜드가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악한 존재라고 해서 비인간적이라고 규정하는 것 또한 으레 말하는 ‘인간적이다’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면 그렇지도 않다. 스트릭랜드는 악한 존재일 수는 있으나 비인간적인 존재는 아니다. 인간도 얼마든지 악한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양서류 인간으로 돌아가서 더 살펴보자. 그 양서류 인간은 양서류에 가까울까? 인간에 더 가까울까? 두 가지 방식으로 호흡을 하는 것을 보면 양서류라고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 양서류는 체외수정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 양서류 인간은 인간의 생식 방법으로 사랑을 나눈다. 영화는 또 그 사랑의 방식을 굳이 젤다와의 대화를 통해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만다. 그 설명을 통해 양서류 인간은 남성임이 드러나고 종에 관계없이 양서류 인간과 일라이자는 이성애의 관계에 국한되어 버리고 만다. 그 설명이 없었더라면 오히려 영화가 주는 상상력의 폭은 훨씬 넓어지고 사랑의 물결도 더 멀리 퍼져가지 않았을까 아쉽다. 일라이자의 욕실을 가득 채우고 아래 극장까지 떨어지는 물의 시퀀스. 버스에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랑의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다가 하나로 합쳐지는 물방울 씬 만으로도 서로 다른 두 존재의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하고도 남았을 텐데 영화는 구차한 설명으로 인간의 한계에 스스로를 가두고 만다.



영화 제작노트에서 이야기하는 양서류 인간의 모습은 스트릭랜드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어렵게 구현된 디자인이 충분히 매력적인지 그만의 방법으로 테스트하기도 했다. 그는 “매일 집으로 디자인을 가져가 여성들의 의견을 물었다. 엉덩이나 복근이 이 정도면 괜찮은지, 어깨를 더 키울지 줄일지 등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괴생명체로 만들어야만 했다”며 제작에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완성된 괴생명체의 디자인에 대해 더그 존스는 “이 괴생명체는 우아하고 강하다. 탄탄한 몸에서 투우사의 섹시함이 느껴진다”라며 만족감을 전했고, 괴생명체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엘라이자 역의 샐리 호킨스 역시 “괴생명체는 지금까지 본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덕분에 그에게 매혹되는 엘라이자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다”라고 전하며 완벽한 괴생명체의 탄생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51551#actor_area 의 제작노트 중에서


양서류 인간의 겉은 양서류지만 그의 골격과 근육은 백인 남성의 이상적인 몸매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떡 벌어진 어깨, 길쭉한 팔다리, 탄탄한 가슴 근육과 좌우대칭으로 균형 있게 갈라진 복근, 탱탱하게 ‘UP’된 엉덩이 등 두말할 것도 없이 매력적인 섹시한 남성의 ‘셰이프’인 것이다.
거기에다가 생명을 되살리는 신과 같은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존재다. 그는 홀로 이 세계에 떨어져 나왔지만 결코 힘이 없는 소수가 아니다. 생태계 먹이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있을법한 존재에 더 가깝다. 그런 존재가 완벽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피부만 양서류지 알맹이는 허리우드 영화의 히어로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영화도 허리우드 상업 영화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지만.



영화의 마지막 스트릭랜드가 죽기 직전에 양서류 인간에게 말한다
“네가 신이구나.”
총을 맞고도 다시 복원되는 양서류 인간의 탄탄한 가슴 근육을 보았을 때 스트릭랜드는 양서류 인간을 신과 다름없는 존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젤다보다 자신이 더 신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하던 그에게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는 양서류 인간은 자신보다 더 신에게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영화는 다른 존재간의 초월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렇게 신으로 상정된 이상적인 인간상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사랑에서 모양은 얼마나 중요할까? 사랑하는 대상의 외형은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정말 외모에 상관없이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괴생명체 마저 인간의 형상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우리는 진정 다른 형상, 다른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형태를 배제하고 관계를 생각할 수 있을까? 토가 나올 정도로 이상하게 생기고 역한 냄새가 나는 어디가 눈, 코, 입인지 모를 형태의 생명체였다면 일라이자는 사랑을 느꼈을까?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면?



얼굴.
스트릭랜드가 호프스테틀러 박사에게 총을 쏜다 얼굴을 관통한다. 총알이 관통된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질질 끌고 간다. 인간임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형태인 얼굴에 폭력을 가한다.
-영화 ‘판의 미로’에서도 이와 같은 장면이 있다. 칼을 입에 넣고 당긴다. 입이 찢긴 장교가 술을 마시자 볼에서 술이 줄줄 새어 나온다. -
얼굴에 가해지는 폭력이 다른 곳 보다 더 참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 형태 때문이 아닐까? 수많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얼굴의 형태. 형태가 감정에 미치는 영향력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다. 얼굴 표정은 감정이 물질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 아닌가? 형태와 사랑 혹은 마음이 맺는 관계는 정말 끈끈하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라고 안일하게 결론을 내리기엔 현실에서 형태 혹은 외모의 영향력은 무시하기 어렵도록 강하다. 게다가 친근한 형태와 낯선 형태가 갖는 영향력은 엄연히 다르다. SNS에 수많은 강아지와 고양이가 귀여움을 뽐내며 나오지만 귀여운 개구리를 찾기는 힘들다. 언제나 의인화되어 표현되는 인간 이외의 종들. 이 영화 또한 그 영향력의 관계를 고려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그 선을 넘었다면 이 영화는 멜로적인 성격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양서류 인간의 환상적인 몸매, ‘환타스틱한 셰이프’는 ‘판타지’ ‘멜로’ 영화로서의 적정선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 선을 넘었다면 에일리언이나 플라이 같은 공포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엉뚱하게 넘어가자면 사랑의 반대는 공포일 지도 모르겠다. 스트릭랜드의 폭력적인 행동은 바로 그 엄격한 선을 지켜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스트릭랜드는 양서류 인간이 정말 인간처럼 생겨서 두려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 나의 손가락을 자르고 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생기는 두려움 또한 스트릭랜드의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것을 아닐까. 어찌 되었든 스트릭랜드는 사랑보다는 두려움 가득한 내면을 가진 인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공포를 극복하는 힘이 바로 사랑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나와 다른 대상을 무서워하지 않는 용기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것 아닐까? 일라이자는 괴생명체 혹은 양서류 인간을 사랑을 할 수 있을 만큼, 스트릭랜드보다 딱 그만큼 더 용감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서류 인간이 ‘인간’보다 다른 종에 더 가깝게 그리는 용기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픔에 다가가는 순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