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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Nov 19. 2016

소년이여, 신화 따위 되지 마라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읽고

*이 글은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를 읽은 후 아래 데이터베이스의 글들을 인용 편집하여 '2차 생산물'로 만든 것입니다.


데이터베이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미야자키 쓰토무 – 위키백과에서 발췌 / 신세기 에반게리온 / 에바로드 / 지젝 / 끝없는 일상을 살아라 / 들뢰즈 /김재인 / 안티오이디푸스 - 옮긴이의 말 ......



근대

작은 이야기에서 큰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상의 시대(1945~1970)

미야자키 쓰토무. 1962년 8월 21일에 도쿄 도 니시타마 군(현, 아키루노 시) 이쓰카이치 정의 신문사 사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명의 누나가 있었다. 증조부는 촌회의원, 할아버지는 정회의원 등 지방의원을 지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근대에서 포스트모던 이행 시기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 '허구의 시대'. 양자를 연결하는 스노비즘을 필요로 함. 미숙아로 태어난 그는 손이 안 돌아가는, '양측 선천성 요척골 유합증'이라는 장애를 앓고 있었다. 이후 급우들에게 이지메를 당했고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와도 불화하였다. 그러던 중 자신을 위로해 주던 어떤 소녀를 보고 소녀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괴수 박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괴물에 관심을 가졌다 한다. <건담>의 팬은 '우주세기' 연표의 정합성이나 메카닉의 리얼리티를 이상하게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1월 쓰토무의 아버지가 그의 죄를 대신하겠다는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죽은 것은 아니며, 아버지는 '사념체'로서 망령처럼 시공간의 틈을 방황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오히려 망령이 결정권을 쥐고 있기도 하다. 정신과 의사 사이토 다마키는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에서 오타쿠들의 성적 욕망이 '철저하게 공허한 존재'인 '페니스와 동일화한 소녀'를 향해 있다고 논하고 그 소녀의 이미지를 '전투미소녀'라 불렀다.알기 쉽게 바꾸어 말하면, 오타쿠계 문화에서 소비되는 소녀의 이미지는 현실의 여성과는 관계없이 오히려 오타쿠들 사진의 페티시라는 것이다. 전라의 소녀가 페니스적인 형태를 가진 기계로 변형하는 <SMP ko2>연작은 바로 이 사이토와 같은 통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무라카미는 거기에서 '전투미소녀란 실은 오타쿠들 자신의 페니스이다'라는 감춰진 구조를 페니스와 닮은 기수에 새긴 여성 성기로 작품화해 오타쿠들에게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끝없는 일상에 적응할 수 없는자 - 옴 진리교도 - 폐쇄성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미야자키 쓰토무는 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 기소되어 사형 집행을 판결받고, 집행된 인물이다. 이마다 유코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두 수준을 연결하지 않고 따로따로 공존시켜간다. 작은 이야기에 깊이 감동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세계관(큰 이야기)과 연결짓지 않고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즉 '해리적'이다 주인공은 아버지가 사랑한 계모와 성행위를 하고 나아가서는 딸과 성행위를 하는데, 누구도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고 단지 시공의 저편으로 날려져버릴 뿐이다....<에반겔리온>의 많은 팬들은 주인공의 설정에 감정이입하거나 여주인공의 에로틱한 일러스트를 그리거나 거대 로봇의 피규어를 만글기 위해서만 세세한 설정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런 한 편집증적인 관심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이사응로 작품세계에 몰입하는 일은 적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는 그 공상이야말로 커다란 이야기가 조락한 후 세계의 의미를 재건하려고 하지만 달성하지 못하고 결국은 단지 작은 감정이입을 거듭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리얼리티를 독특한 수법으로 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큐멘터리 '에바로드'(2013)를 만든 박현복은 MBC 예능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게스트로 나와서, 복잡하고 창세기와 같은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을 그냥 한마디로"로보트가 있고,로보트를 타기 싫은 주인공과 로보트를 태울려는 아빠와의 갈등, 네 막장드라마에요."라고 간단하게 일축해서 설명한다.그들은 에바로드를 완주하면 주는 경품으로 '신극장판 에판게리온Q' 입장권과 원작자가 그린 '캐릭터 원화'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캐릭터 원화를 선택했다. 마리텔에 그 원화를 들고 나와서 자랑했다.


결론으로 들어가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의미'에 대한 갈망을 사교성을 통해 충족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동물적인 욕구로 환원함으로써 고독하게 채우고 있다. 거기에서는 작은 이야기와 커다란 비이야기 사이에 어떠한 연계도 없고, 세계 전체는 단지 즉물적으로 누구의 삶에도 의미를 주지 않는 채 표류하고 있다. 의미의 동물성으로의 환원, 인간성의 무의미화, 그리고 시뮬라크르 수준에서의 동물성과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의 인간성의 해리적인 공존.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

동물화한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자본주의가 주는 데이터베이스만 먹고 사는 사람인가

아버지-어머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긋지긋한 오이디푸스 삼각형.

오늘날 정상적인 삶은 실은 예속된 삶이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마련해 놓은 길을 얌전히 따른다. 자본주의는 현대인의 무의식이요, 그 중요한 길들은 시장과 돈이다. 시장과 돈을 직접 비판하지 않는 정치철학은 더 이상 무용지물이다.


욕망과 매우 긴밀하게 연계된 것인 망상을 보자면, 사람들은 전세계를 역사, 지리, 부족들, 사막들, 민족들, 인종들, 기후들을 망상하지 가족과 아버지와 어머니를 망상하지 않는다.

잘 산다는 건, 모든 과거에도 불구하고, 모든 과거를 무릅쓰고, 지금 이 순간 최선의 것을 행하는 것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에 불과하다. 노는 아이와 탐구하는 노인은 이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하다. 미야다이의 '끝없는 일상을 살아라.' 고갸루. 1995년 이후 스트리트계 소녀들의 즉물적인 행동원리를 높이 평가 '유유자적 혁명', '의미에서 강도로' 적응할 수 있는 자 - 블루세일러 소녀 ... 기호화되고 익명화된 도시문화 속에서 ... 느긋하게 살고 있는 90년대의 블루세일러 소녀들에게는 더이상 세계 전체를 바라보려는 의지(전면적 포괄요구)도 그 단념에서 오는 과도한 자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의미와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야기 소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늘 배고프고 먹고 놀고 자고 이를 반복하는 아이의 삶, 은퇴하고도 여전히 이런저런 의문을 탐구하는 노인의 삶. 뭘 이루려 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이룰 여지도 희박한 그런 삶.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삶.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최선인지를 실천하는 삶.


오타쿠. 그들은 어린이처럼 놀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노인처럼 탐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이여 신화 따위 되지 마라.

지금처럼 아이처럼 놀아라.

소년이여 블루세일러 소녀가 되라.



책정보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5460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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