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기 Nov 22. 2016

피로하니 분노하라!

한병철, '피로사회'를 읽고

이 책을 읽고 많이 공감하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몸소 느꼈던 바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니, 소진 증후군을 겪는 삶을 살았지만, 그게 정말 내가 원해서 자기를 착취했던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뭔가 찝찝하고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울분이 치미는 것이다.

가슴에 응어리가 죽어버려라, 죽어버려라, 죽어버려라를 되뇌인다.


첫 번째 죽어버려라! - 짜증


"이 도시에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 새벽녘 집으로 가는 택시 밖으로 펼쳐지는 찬란한 야경. 영생을 꿈꾸는 그 아름다움은 하나의 조명에 갇혀 일하는 야근자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겠지. 아! 죽을 수 없는 자들의 눈빛! 모두가 그 속에서 꿈, 희망, 행복을 이야기한다. 당신 바로 옆에 꿈이 있어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죠. 희망을 품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한 날이 당신 앞에 펼쳐질 거예요. 어디서든 꿈과 용기를 가진다면 아프지 않아. 아파도 멋진 인생이야. 지금 너의 일을 사랑하렴. 피할 수 없다면 즐겨. 이런 말들로 인해 이 깊은 밤에도 불빛들이 밝게 빛나고 있다. 그 밝음,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처럼 박제된 밝음 때문에 현기증이 났다."

https://brunch.co.kr/@fnajk77/75 중에서

 


오늘날의 사회는 성과사회이며 도핑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극단적인 피로와 탈진 상태에 있다. 부정성의 결핍과 과도한 긍정성으로 죽지 못해 산다.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 때문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우리의 영혼은 경색된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는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을 상실한다. 잠시도 멈추지 못하고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짜증만 낸다. 성과사회는 우리를 개별화하고 고독한 피로 속에 살게 한다.


우리가 모두 예외 없이 '죽지 않는 자들Untote'이다. 언데드. 좀비처럼 우리는 성과라는 먹잇감만 보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닌다. 먹잇감이 나타나면 하나같이 우르르 몰려든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이 치료약이라도 찾아다니지만, 한병철은 성과사회에서 죽지 않는 자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도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은 무감각, 불감증의 사회에서 중단하는 본능도, 자극에 대한 저항도 없이 살아간다.
그냥 죽어 버리는 게 좋을 삶이다.



두 번째 죽어버려라! - 에로틱하게 죽기


" 우리의 성행위는 우리를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이미지에 가 닿게 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인식은 에로티즘의 심연을 더 깊게 한다. 부패는 끊임없이 성행위 위로 솟구쳐 올라 그것을 더욱 에로틱하게 만든다. [......] 욕망이 공허를 욕망하면-또는 죽음을 욕망하면- 고뇌는 더욱 커지면서 욕망의 대상을 그만큼 강하게 욕구한다. [......] 파멸의 추구가 축제에서 얻는 것은 환희이다. 우리는 공허에 다가간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빠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현기증에 취하고 싶으며 그래서 추락의 이미지면 충분하다."
-------------------------------------------------------------------조르주 바타이유, '에로티즘의 역사' 중에서


한병철은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성과사회의 피로'에 대립자로서 한트케의 '우리-피로'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책의 마지막을 거의 다 할애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지만 '우리-피로'는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세운다. 틈새를 열어준다. 남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또한 남이고 남이 동시에 나이기도 한, 아무도 그 무엇도 지배하지 않고 지배적이지 조차 않은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다.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로서 그것은 치유의 형식이며 심지어 젊음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에로틱하다.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결합 후의 피로는 달콤하고 죽음의 나락 가까이 이끄는 현기증에 취하는 시간은 오히려 평화롭다.

"죽는 줄 알았네."

라고 대화를 나누다 잠이 든다. 축제의 카니발에 도취한 사람들. 클럽에서 나온 이른 아침 시간. 그 속에 피로는 흩어져 있는 개개인을 하나의 박자 속에 어울리게 한다. 무위, 막간의 시간, 평화의 시간 속에 있는 이 '근본적 피로'는 자아의 논리에 따른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 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세 번째 죽어버려라! - 분노


그런데 뭔가 억울하다. 무언가에 내몰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밀 독서단에서 '성과사회는 타인이 아닌 내가 나를 착취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기 때문에 내가 피로해진다. 이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치유 가능하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치유적인 피로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서 깨어나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고 이 책의 옮긴 이는 말하고 있지만, 이렇게 다시 '내 탓이오'로만 돌아가야 할까?


'우리-피로'의 사회로 가기 위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에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긍정성의 과잉만큼이나 헛된 자기부정일 뿐이다. 정작 ‘아니오’라고 말하려니 그 말을 들을 사람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 같은 찝찝함. 그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다. ‘치유적인 피로’라는 신비로운 말 뒤에 ‘아니오.’라고 부정해야 할 대상이 숨어버렸다. 무젤만에서 깨어났다고 해서 나치가, 강제수용소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게 하는 폭력. 야근하게 만든 폭력. 일하는데 하얗게 불태우고(소진) 휴일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게 하는 폭력은 여전히 우리를 갉아먹고 있다.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p.22).

성과사회는 규율사회의 멋진 가면일 뿐이다. 거기서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다. 과잉긍정을 강요 당한다. '강제하는 자유'다. 규율사회에는 '하지 마!'라는 부정의 규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안 되면 되게 하여라!'는 과잉긍정의 구호는 철저한 규율사회라고 할 수 있는 군대에서 가장 크게 울려 퍼진다. '예'라고 말해야만 하는 규율이 바로 성과주체라는 가면을 민얼굴에 붙어있게 하는 끈이다. 성과사회가 되었다고 해서 규율이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더욱 정교해지고 은폐된 것은 아닐까? 긍정의 가면을 쓴 규율. '이런 성과를 올려봐! 할 수 있어!'라는 긍정의 말은 '일해, 집에 가면 안돼!'라는 부정의 규율과 다를 바 없다.

정말 나는 스스로 나를 착취하는가? 그렇다면 그 착취로 얻는 이익 또한 오롯이 나에게 와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내가 야근을 하고 열심히 성과를 올려도 그 이익을 가장 많이 가져가는 것은 자본가다. 내가 나를 경영하는 기업가라는 말은 틀렸다. 분배가 공정하지 않은 이상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착취라는 것은 타인이 나에게 하는 착취의 수단이 될 뿐이다. 재벌들이 자기 착취를 할까? 재벌이 성과를 내는 것은 타인을 착취해서다. 그들에게 자기 착취란 없다. 비밀독서단에서 피로사회를 다루면서 이동진은 절대적 경쟁 즉 자신과의 경쟁에서 피로를 가장 많이 느끼는 사람이 오히려 서울대생일 수 있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 논리가 어떤 특권 세력의 면죄부로 이용되는 것은 바람직 하지 못할뿐더러 대단히 위험하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제 우리가 '아니오!'라고 부정해야 할 무언가가 보인다.
여전히 우리를 착취하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 그 시스템은 계속 가동하고 있다. 가해자는 있다.
우리는 그 가해자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분노해야 한다.
'죽어버려라!'라고. 증대되는 세계의 긍정성에 침을 튀길 분노. 그 시스템에 비상경보기를 울리고 브레이크를 당길 분노. 중단하는 본능.

"계급투쟁이라는 관념은 오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힘겨루기가 아니다. 또는 다 끝나고 난 후 승자에게는 좋은 결과가, 패자에게는 나쁜 결과가 주어지는 투쟁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사실들을 낭만적으로 얼버무리게 된다. 부르주아지는 투쟁에서 이기든 지든 그들의 발전 과정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될 내적인 모순에 의해 몰락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만 자멸할 것인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몰락할 것이가 하는 것 뿐이다. 3천 년 동안 이어져온 문화 발전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가 아니면 이대로 끝나버릴 것인가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역사는 영원히 투쟁하고 있는 두 명의 전사의 이미지로 표현되는 악무한과는 전혀 무관하다. 진정한 정치가는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상황을] 계산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를 폐절하는 것이 경제와 기술 발전의 거의 계산 가능한 시점(그것은 인플레이션과 독가스전에 의해 예고되고 있다)까지 완수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불꽃이 다이너마이트에 닿기 전에 타고 있는 도화선을 잘라야 한다. 정치가의 개입, 위험, 템포는 기술적인 것으로 기사도와는 무관한 것이다."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기>, '일방통행로' 중에서


멈추지 않는다면 자멸이다. 이 세상을 다 말아먹고 자멸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망할 때 세상밖에 있을 수는 없다. 공멸이다.

그래서 멈추어야 한다. 전학교 휴교. 국민 총파업. 전방위적인 멈춤의 연대.

그리고 분노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착취하는게 아니라고.

너희들의 착취로 나는 피로하니 분노하겠노라고 외쳐야 할 것이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p.50)              



책정보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32022888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조용히 죽어가게 내버려두면 좋겠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