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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Nov 24. 2016

존재의 텅 빈 총성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

세상에는 이렇게 부를 노래가 많은데


내가 굳이 또 이렇게 음표들을 엮고 있어요


사실 내가 별로 이 세상에


필요가 없는데도 이렇게 있는데에는


어느 밤에 엄마 아빠가


뜨겁게 안아버렸기 때문이에요



어감이 좋은 동네에서 살아가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이름이 무서웠거든요


모두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그 방법은 다들 다르더군요


결과적으로 나는 또 멍청이가 된 것 같은데


어떡하죠


---------------------요조, '나의 쓸모'-



https://youtu.be/1uumPhlTebo

























  



이 세상의 이름이 무섭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름을 제거하면 우린 아무것도 아닐까?

의미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닐까?

세상에는 이름이 없는 것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그래서 그 이름들이 무섭다. 언어의 속박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태어나면 우리는 이름을 가진다.

자식으로 형제로 친구로 연인으로 아내나 남편으로 부모로

수많은 의미를 짊어지게 된다.

그런 의미가 없는 자리에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잉여. 텅 빔. 

이 세계의 빈칸에 나는 존재한다.

의미가 없다고 그 존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돌이나 바람이나 바다처럼.


이름이 없는 것들, 의미가 없는 것들, 언어로 말해지지 않는 것들.

그런 존재들이 이 세계의 빈칸에 있다. 이방인이다.

이방인은 또한 이 사회에서 -재판의 세계에서-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노숙자, 부적응자, 일 잘 못 하는 직장인. 잉여 인간.

'어느 밤에 엄마 아빠가 뜨겁게 안아버렸기 때문에' 쓸모가 없음에도 존재하고 있는 인간들.

빈칸들.

그런데 그 빈칸이 세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안에 있다.

세계는 빈칸을 포함한다. 그래서 부조리하다.

수많은 의미가 이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곳에 바로 잉여가 있다.

그 잉여를 만날 때 우리는 부조리함을 느낀다.

이런 의미도 저런 의미도 가질 수 없을 때 우리는 부조리함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그 잉여가 '재판의 세계'의 부조리함을 드러나게 한다.

노숙자, 해고자, 부적응자, 백수, 잉여인간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나게 한다.  


어감이 좋은 동네는 이방인이 사는 곳이다.

어감 그 자체는 어떤 명확한 의미도 지니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

그 존재를 만나고 싶을 때, 이미 이름을 가진 우리는 무섭다.

형제, 자식, 남편 등의 이름을 가진 내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나의 존재를 만나고 싶을 때,

난 두렵다. 

그런데도 그 빈 곳으로 가고 싶다. 부조리다.


뫼르소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p.8) 이 세계는 한 존재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뫼르소는 이런 의미과잉의 세계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p.60) -


-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p.69) -


뫼르소는 이렇게 의미를 꺼린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허무주의는 아니다.

의미가 없는 여기에도 내가 있다고 소리를 내는 것이다.

존재의 긍정이다.

아무 의미 없는 것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랑하건 말건 마리를 받아들인다.

물에 몸을 담갔을 때 처럼.


-어쨌든 나는 실제로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을는지도 모르겠으나, 무엇에 관심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명백히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p.152)-


의미를 하나하나씩 제거했을 때, 비로소 존재는 명백히 드러난다.


태양도 그렇다.

몸, 감각, 움직임.

아무 의미 없는, 언어에 묶이기 전 바로 그 텅 빈 존재를 만나는, '육화된 신화'. 

태양 아래서 뫼르소는 그 신화의 총성을 울린다.

의미 있는 한 발

그 후, 

네 발의 의미 없음.





읽은 판본은 책세상에서 나온 알베르 카뮈 전집2 '이방인'입니다.)




책정보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7013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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