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후미타케,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다.
이 책을 읽고 정말 용기를 갖게 되는 사람도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런 책이 이렇게 잘 팔리는 현상을 나는 늘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다.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면 도대체 미워하는 사람은 누군가? 누구에게 우리는 미움받는가? 누가 이 책을 읽는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할까? 재벌 총수가 자신의 욕심대로 부를 긁어모으면서 미움받을 걸 걱정이나 할까? '헐' 소리가 나오게 하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다들 날 미워하겠지만 이 말 용기 내서 꼭 해야겠어!'라며 다짐하고 그런 말들을 내뱉을까?
결국 미움받을 용기를 내라고 하는 건 갖지 못한 사람이 죽을 각오로 노오오력해야 한다는, 그래야 뭐든 바꿀 수 있다는 규범으로 변질되고, 가진 자들(미워하는 자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나는 계속 너희들을 미워할 테니 미움받을 용기가 있으면 해보든가.' '니가 안되는 건 모두 너의 용기 부족 때문이야'라는 식으로 말이다. 또, 이런 유의 책을 읽으며 자기 내부에 천착하는 사이 눈가리개를 씌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미움받을 용기를 읽으면서 정작 누가 누굴 미워하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용기는 미움받더라도 고군분투 살아가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더 필요하고 또 요구되어야 한다. '맞더라도 할 말은 해라.'가 아니라 '할 말을 하더라도 때리지 말아라.'고 해야 되는 것이다. 미움받을 용기만 있고 가진 자들의 미워하지 않을 용기가 없다면 우리들 중 누군가는 또 주장할 것을 당당하게 주장하다가 물대포를 맞고 쓰러질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불편함을 이유로 "됐어, 이제 좀 그만해."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죽도록 맞은 자를, 절규하는 이들을 쉽게 미워하지 않는가.
"의식상 대등할 것", "과제의 분리", "어떤 경우라도 공격하는 '그 사람'이 문제이지 결코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사실"(미움받을 용기)을 받아들이고 미움받을 용기로만 살기에 이 사회는 "우리가 확실히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맞아라, 우리는 이 정도라야 믿는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라고 할 정도로 참혹하다.
정말 수평관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시 퇴근하는 직원에게 눈치 주지 않을 기업주의 용기, 여성을 혐오하지 않을 남성의 용기('미움받을 용기'를 읽기 전에 '페미니즘의 도전'부터 읽어보길 권한다),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나눌 수 있을 가진 자들의 용기다. 이 사회에서 또 그만큼 절실한 것은 미움받을 용기보다 미워하지 않을, 즉 미움받을 용기까지나 갖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을 미워하지 않을 용기 아닐까?
책정보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96991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