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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Mar 20. 2017

비에 젖은 소녀

비오는 소리를 들으면

누워 있으면 빗방울이

안마당을 덮은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여행의 문을

두드린다


여행의 감각이 열린다.


그래, 비는 오는데

엄마는 오지 않았지


난 지금 여행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부르지도 않았는데

마당으로 들어온다


그래, 비가 오니까

여행이 그렇게

들어와 버리더라

엄마는 오지도 않았는데

부르지도 않았는데



네팔에서 6월, 비가 한 번씩 좍좍 오기 시작하면서 우기가 슬며시 시작되는 때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코스 트레킹을 마친 나는 아내와 포카라에서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참 단순한 나날들이었다. 오전 늦게 눈을 뜬다. 창밖의 날씨를 확인하고 아내를 본다. 아직 좀 더 자고 싶어 하는 눈치다.     


나 마실 갔다 올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음…. 아니요. 잘 갔다 와요~.

그래요, 더 자요~.


대충 씻고 숙소를 나와 골목길을 어슬렁어슬렁 내려온다. 큰길에 다다르면 호수가 실어다가 주는 상쾌한 공기가 무거운 등산화를 벗고 샌들을 신은 발에 가볍게 닿는다. 오른쪽으로 가볼까. 왼쪽으로 가볼까. 오른쪽으로 큰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거리에 나와 있는 옷들과 기념품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이제 막 트레킹을 나서는 여행자들의 상기된 얼굴이 반갑기도 하고 이미 안나푸르나를 갔다 온 경험자로서 누리는 뿌듯함도 느낀다. 지나가는 소들의 속도에 맞추어 느리게 걸어보고 기념품 가게의 귀여운 털복숭 야크 인형을 한참 보다가 산에서 진짜 야크를 보지 못한 게 아쉬워지기도 한다. 그렇게 걷다가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에서 다시 돌아온다. 숙소가 있는 골목길을 지나치고 더 내려가 본다. 호수의 반짝거리는 빛 조각들이 새소리와 섞인다. 콘크리트로 만든 탁구대에서 탁구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둑 아래에는 축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경기 저 경기를 번갈아 구경하다가 길을 건넌다. 거의 매일 가다시피 하는 한인 식당에 들어간다.     


사장님, 책 좀 빌려 갈게요.

네.


과도한 친절함도, 언짢은 불친절도 없는 사장님의 태도가 편안함을 준다. 야외 테이블 밑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졸린 눈으로 엎드려 있다.     


저녁에는 밥 먹으러 올게요.

네~.


숙소로 돌아와 책을 보고 엎드려 있으면 아내가 눈을 뜬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밥 먹고 들어와서 책을 보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한인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식당 주인 커플과 이야기를 나누며 놀다가 다시 숙소에 들어오고. 잠들고.               


다음 날도 똑같은 시간을 보낼 테지만 지겹지 않은 반복이다. 그리고 이 느슨한 반복에는 얼마든지 다른 일들을 해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 반복 속에 차이를 만드는 자유가 깃들어 있었다. 잠시 다른 곳을 다녀온다거나 여행지에서 발견한 악기를 연습한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여행 속에 작은 여행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아침에 잠깐 비가 온 어느 날, 느슨한 반복에 다른 사건을 집어 넣기로 했다. 호수에 인접한 여행자 거리에서 벗어나 현지인들이 가는 시장과 ‘비나엑’이라는 대형 슈퍼마켓이 있는 지역에 가보자고 한 것이다. 인도에서 알게 되었다가 여기 포카라에서 다시 만난 여행자와 나 그리고 아내는 한인 식당 사장님이 가르쳐 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로컬버스는 낯선 거리를 달렸고 새로운 풍경이 지나가는 창밖을 별생각 없이 구경했다. 슈퍼마켓에서 아이쇼핑을 하고 제대로 얼어있지도 않은 아이스크림을 한 통 사서는 건물 구석에 세 명이 둘러앉아 마시듯 퍼먹기도 했다. 현지 시장에 들러 과일을 사기 위해 손가락을 하나둘 접고 피면서 흥정을 해보기도 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이 울려 퍼지고 있는 거리 집회도 구경했다. 호기심을 가득 머금은 채 낯선 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눈을 들어보니, 어느새 멀리서부터 먹구름이 낀다. '자! 어디 한번 실컷 퍼부어 볼까!’라고 하듯 파란 하늘을 걷어차면서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자.


비가 한두 방울 시작될 즈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가 야단법석 우글대는 소 떼처럼 아래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버스가 굵직한 빗방울들을 뺑소니치듯 튕겨내며 달렸다. 나는 제일 앞 운전사 바로 옆줄에 앉았는데, 바로 코앞의 커다란 전면 유리가 덜컹덜컹하고, 창틀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빗물이 내 팔에 톡톡 떨어졌다. 여기서 이 정도면 양호한 버스라 생각하면서도 살짝 긴장된 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 전방을 예의 주시하였다.


그때 저 앞에서 한 버이니(나이 어린 여자를 부르는 네팔어: 소녀)가 길을 건너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 소녀를 앞질러 가는 또래 남자 녀석 옆에는 함께 손을 잡고 뛰어가는 디디(손위 여자를 부르는 네팔어: 누나/언니)가 있었다. 머지않아 그 둘은 시야에서 사라졌고 소녀는 혼자가 되었다. 버이니는 뭔가 체념한 듯 자신의 발보다 훨씬 큰 샌들로 땅을 툴툴 치듯 걸어간다. 홀로 장대비를 맞으며 골목길로 접어 들어가는 그 아이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마중 나온 사람이 없는 빗속에 홀로 남겨진 이. 그 모습은 영화나 광고에서 반복되는 진부한 장면과 비슷했다. 그런데도 비에 젖은 소녀의 등을 보니 왠지 뭉클해졌다. 버스로 지나쳐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여기 멀리 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아이의 모습이 눈과 마음 사이에서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무심한 듯 발아래를 내려 보는 커다란 눈망울이 아른거렸고, 기다란 속눈썹이 커다란 빗방울을 물거품처럼 흩트리고, 부서진 빗방울은 또르르 굴러와 내 마음을 적셔주었다. 흙탕물이 튀고 쓰레기가 들러붙은 길 위 빗속에서 혼자인 그 소녀는 외로움도 서글픔도 아닌, 다른 차원의 감응으로 빚어낸 도자기처럼 은은한 빛을 품고 있었다.               


이런 독특한 감정에는 어떤 힘이 있다. 여행에서 마주치는 풍경 속에서, 어떤 작가나 예술가의 고유한 스타일을 통해서, 사람 사이의 충만한 교감에서 우리는 이러한 감응과 정서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너무 촘촘하게 붙어있어서 다른 어떤 일에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일상에서는 살필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반복되던 일상을 흔들어 깨트리고, 그 순간 숨어 있던생기가 고개를 내밀어 우리와 눈을 마주치게 한다. 여행의 느슨한 일상이 아니었다면 난 그 소녀를 볼 수 있었을까. 비가 내렸고, 소녀가 있던 그 순간, 마음속 눈을 가리고 있던 반복의 장막이 너울거리며 낙하하였고, 그 뒤에 생성의 무대가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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