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만난 인간
뾰족한 얼굴이 주먹을 번쩍 들었다.
이제는 강도다.
나는 주먹을 살피는 것처럼 위로 올려다본다. 마주 보던 검은 얼굴에 박힌 두 눈이 희번득한다. 순간 힘껏 가방끈을 당기며 상대의 낭심을 발로 찼다. 맞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머리통의 관자놀이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검은 얼굴이 옆으로 쓰러지자 나는 몸을 숙여 옆에 남은 놈의 양쪽 오금을 당기며 번쩍 들어 올려 다리 난간 너머로 녀석을 떨어뜨려 버렸다. 퉁! 다리 밑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으 씨! 다리 위에 남은 녀석이 다시 일어나려 했다. 난 그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무릎으로 인중을 찍어버렸다. 앞니가 후두두 떨어지며 피를 쏟았다. 정신을 잃은 듯했지만 쫓아올까 두려웠다. 엎드려 있는 녀석의 발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비쩍 마른 몸뚱이가 가벼웠다. 차도와 인도 사이 경계석에 발목을 비스듬히 걸쳐놓고 붕 뛰어올라 밟아버렸다.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비명은 나지 않았다.
훗 날 이런 장면을 몇 번이고 상상하면서 분풀이를 했지만 실제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일단 아내가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 명과 싸움이라도 붙는다면 나머지 한 명이 아내에게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에 감히 싸움을 시도할 수 없었다. 방어를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을까? 난 계속 상대의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먹을 번쩍 들었을 때도 상대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다음 행동을 알려면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예민한 감각이 뭔가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뒤에 있는 아내에게 신경이 먼저 집중되었고 오른쪽 옆구리에 붙이고 있는 가방을 꼭 쥐고 눈은 검은 얼굴의 눈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야는 옆의 녀석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최악의 순간에는 가방을 놓고 도망치는 거다. 가방에 여권이랑 돈이 들어 있었지만 (그래 아마 이 녀석들은 우리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사에서 많은 돈을 꺼내는 것을 봤을 테다) 할 수 없다.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된다면 싸웠을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을 때 강도들도 행인을 보아서인지 기세가 한풀 꺾여 주춤하였다. 우리는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아내는 계속 헬프미를 외쳤다. 정말 다행으로 뒤에서 제법 많은 행인이 오고 있었다. 강도들도 뒤에 사람이 오는 것들 봤을까. 가방끈을 세게 잡아당기자 검은 얼굴이 끈을 놓쳤다.
뛰어!
아내에게 소리쳤다. 우리는 냅다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오던 행인들 사이로 들어가서야 강도와 대치한 곳을 뒤돌아보았다. 이미 그들은 사라진 후였다. 다시 어디서 툭 튀어나오지 않을까 두려워 우리는 한참 동안 다리를 건너지 못한 채 주변을 살펴야 했다. 그러다가 차도 건너편의 인도로 가서 사방을 경계하며 다리를 건넜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숙소를 향해 빨리 걸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
글쎄 별로 소용없을 것 같은데. 우리가 뺏긴 것도 없고, 내일 또 바간으로 가야 하는데 지체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곤란하지 않을까?
하긴 그렇기도 하네. 오빠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아뇨 없어요. 괜찮아요? 많이 놀랐지요?
휴……. 정말 아까 그 인도계 같은 사람이 칼 꺼냈을 때는 오빠 어떻게 될까 봐 너무 놀랐어요.
칼을 꺼냈었다고?
에에? 응. 칼인지 뭔지 날카로운 걸 들고 막 찌르려고 하는 것처럼 위협했잖아요. 오빠 못 봤어요?
그랬어? 난 칼 같은 건 못 봤는데.
헐 진짜? 우와……. 어쩐지 오빠가 너무 침착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칼을 못 봤구나?
네. 못 봤어요. 주먹으로 그냥 때리려고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어두워서 안보였나 봐. 어쨌든 난 뒤에 있는 너랑 가방이랑 거기에 신경이 다 쏠려있었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오히려 못 봐서 다행인 것 같다. 봤으면 같이 흥분해서 더 큰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잖아.
진짜…….
칼을 보지 못한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나까지 더 흥분하게 됐더라면 사건이 정말 어떻게 흘러갔을지 생각하니까 오싹했다. 누가 죽었을 수도 있고, 철컹철컹 먼 외국 땅에서 철장 신세를 져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스펙터클한 양곤이구나. 불과 바로 전날에만 해도 현지인 친구들의 친절에 '사람들이 너무 좋구나!' 감동했는데, 하루 만에 이런 일을 당할 줄 누가 알았을까.
9개월이 지난 어느 날, 우린 스페인의 어느 바에서 티브이를 통해 미얀마의 아웅 산 수지 여사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그 세명의 여자아이들이었다. 그렇게 착하고 좋은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미얀마가 되길 바랬다. 그리고 또 미얀마의 종교분쟁 소식을 접했을 때엔 그 강도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군부 독재 때문에 치안이 강하고 안전하다고 듣던 바로 그 미얀마에서 강도를 만났었다. 문제는 그때부터 계속된 건지 모른다. 억압적인 상황에서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안에서 곪아가고 있었던 것들이 부지기수가 아니었을까? 그 강도의 얼굴이 떠오을 때, 귀에 울리는 음성은 무서운 "깁미 더 머니!"가 아니라 "아임 쏘리 아임 헝그리."라는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들의 진짜 목소리는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어두운 표정에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던 한 야윈 인간의 눈빛이 지금 다시 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위 사진 속 사람은 글 속의 강도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양곤 강의 선착장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