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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Mar 23. 2017

꿈이 만든 여행이 만든 꿈

보고싶은 얼굴

탕탕탕! 탕탕탕!      


익스큐즈미 써~!    

 

문밖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눈을 떴다. 아직 주위는 어둑했다.

숙소주인이었다. 주인 왈, 지금 위쪽 지역에서 큰 물(영어로 big water라고 했다)이 내려오고 있단다. 그래서 지금 바로 대피하셔야 한다고. 일단 중요한 것만 챙겨서 나오시라고 했다.


여기는 인도 서북부 라다크 지역의 중심도시 ‘레 Leh’이다. 6월에서 9월 사이에만 육로가 열리는 해발 3250미터의 고산지대로, 건조하여 겨울에 내리는 눈이 아니면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곳이다. 그런 곳에 약 70년 만에 물난리가 났다. 레의 중심 지역은 아직 피해가 없었지만 주변 마을이 당한 피해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레에서 평생을 살아온 80대 노인도 이런 비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며 아연실색한, 레가 그런 수해를 입게 된 그때, 우리는 거기에 있었다.


아내를 깨웠다. 우리 대피해야 된다는데. 아아 뭐지. 여권이랑 복대만 챙기나? 그냥 배낭을 다 싸버려? 우리는 일단 배낭을 다 꾸려서 나가기로 했다. 앞으로 가야 할 여행이 많이 남은 우리로서는 짐을 다 버려놓고 나갈 수는 없었다. 배낭을 풀었다 쌌다 하는 건 이미 숙달이 되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로바로 빨리 배낭을 꾸려서 방 밖으로 나갔다.

 

잠깐 나 화장실 좀…….


이 급박한 상황에 화장실 가려는 나를 보고 아내는 답답해하였다. 숙소 밖을 나오자,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한 해가 푸르스름하게 응시하고 있는 거리가 어수선하게 술렁이고 있었다. 모래주머니를 싣고 가는 차도 보이고, 피난민처럼 이것저것 급하게 실은 짐들과 같이 트럭 뒤에 올라탄 채 마을 위쪽으로 가는 현지 사람들도 보였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우왕좌왕하는 여행자들이 혼란스럽게 오고 갔다. 마음이 그렇게 조급하지는 않았다. 하늘은 쾌청했고, 공기가 습하지도 않았다. 나름 날씨를 파악해보고 주변지역의 지형을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비가 금방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안전하게 높은 지역으로 가기로 했다. 길을 걸으며 아내에게 조금 전 나를 기이한 사건 속에서 헤매게 만들었던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 산사태가 일어나는 꿈꿨어. 카트만두에 있었는데 마차푸차레가 무너졌어. 마차푸차레는 포카라에서 보이는 건데……. 웃기지?

정말? 어제부터 수해 입은 지역 이야기들을 자주 들어서 그랬나 보다.


그랬다. 레 근처의 군부대 병원이 떠내려가서 몇 백 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소문이 들렸고, 레로 들어오는 길도 유실된 곳이 많아 물자 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도로가 끊겨 유조차가 들어오지 못해 기름이 부족하다고 했다. 대부분의 식당들도 문을 닫았고, 문을 연 곳이 있어도 팬케이크나 샌드위치 같은 간단한 식사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밤에는 일찍 전기불이 꺼졌다. 비가 많이 왔던 날 저녁에는 숙소의 흙벽이 흘러내려 우리가 묵고 있는 방 욕실에 흙이 잔뜩 들이치기도 했었다. 스페인 대사관에서는 벌써 조치를 취해 스페인 여행자들은 이미 긴급 비행기를 통해서 도시를 빠져나갔다는 말도 들렸다. 며칠 후의 일이지만 한국 여행자들도 같이 모여 증편된 비행기 표를 구해서 탈출하게 되었다. 현지인들에겐 더 생소한 상황인지 오히려 여행자들보다 더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몇몇 여행자들은 구호 및 복구활동을 돕기 위해 주변지역으로 가는 트럭에 삽 하나씩 들고 몸을 싣기도 했다.


우리는 대피할 곳으로 정한 레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레는 길게 뻗은 황량한 산마루 끝에 왕궁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로 마을들이 펼쳐져 있다. 중심가에서 올려다보면 흙빛 언덕 위의 레 궁전은 뭔가 원초적인 형태가 갖는 숭고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가는 길 사이사이 골목은 비교적 한산했다. 아니, 어느 순간부턴가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좁은 골목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올드 타운으로 들어와서 그런가? 다들 어디로 벌써 대피한 건가? 의아했다. 이상하리만치 적막이 감돌았다. 앞에 가는 아내의 뒤꿈치만 보면서 걸었다. 적막함 속에서 오르막길을 걷고 있는 아내의 아킬레스건이 더욱 긴장돼 보였다. 팽팽한 아킬레스건에 보랏빛 핏줄이 도드라져 보인다. 새벽녘의 차가운 빛이 거기 반사된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그 빛이 아래로 위로 숫돌에 가는 칼날처럼 아킬레스를 반복하여 쓰다듬는다. 아래로 위로. 아래로 위로. 그 걸 보고 있으니 꿈꿨던 게 생각나서 왠지 좀 섬뜩해졌다.


  쨍~.


이슬람 사원 아잔의 시작을 알리는 스피커에서 '쨍' 하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 읊조리는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게 메아리에 실려 왔다. 고개를 들었다. 레 궁전이 보인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 전에는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레 궁전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갑작스레 흔들리기 시작했다. 궁전은 작고 깊은 창으로 먼지 거품들을 구웩구웩 토해내고 있었다. 우주선이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을 때 뿜어내는 뭉게 연기처럼 먼지가 레 궁전 아래에서부터 일고 있었다. 궁전은 우주선처럼 위로 솟아나기는커녕 점점 황무지 언덕 안으로 삼켜졌다. 아잔 소리도 점점 황무지에 파묻히듯 웅웅 거리는 소리로 뭉그러지고 있었다. 귀가 먹먹해진다. 발 앞에 아내의 뒤꿈치가 보이지 않는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아내가 궁전을 무너뜨린 먼지 거품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내를 불렀다.


 '영은아~.'


짜이예


이상하다. 난 ‘영은아’라고 부르는데, 입에서는 ‘짜이예’라고 소리가 나온다. 다시 한 번 불렀다.


'영은아~.'


짜이예.


당혹스럽다.


'신영은!~.'


짜이예.


머리에 떠올리는 말과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귀에서 들리는 말의 관계가 레 궁전처럼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의 목소리도 점점 뭉개지는 기분이었다. 답답했다.


공허하고 슬퍼졌다.


그때 아내가 멈춰 서서 뒤돌아봤다. 얼른 잰걸음으로 가까이 갔다.


거기로 가면  안 되겠는데, 영은......? 누구...... 십니까?


거기에는 아내가 아닌 얼굴이 웃고 있었다. 아무 대답 없이 웃는 얼굴이 낯설다. 그 낯선 얼굴이 더 크게 파안대소를 한다. 그런데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음소거된 웃음이 낯선 얼굴에 붙어있더니 미끄러지듯 밑으로 떨어졌다. 이제 그 얼굴에는 눈, 코, 입 아무것도 없다. 아무 구멍도 없이 희멀건 피부가 얼굴 전체를 덮고 있다. 그런데도 그 얼굴은 계속 웃고 있는 것 같다.


표정 없는 얼굴.

얼굴 없는 표정.


얼굴이었던 살덩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뒤통수 저편에서 새근새근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얼굴이었던 살덩이에서 미끄러져 나갔던 구멍들이 바로 내 뒤통수까지 다가온 것처럼 느껴진다.


눈을 살짝 떴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다.

그녀의 숨소리다. 아내가 잠결에 내게 팔을 감는다.

 

'아......'


더듬더듬 침대 머리맡 휴대폰을 찾았다.

 

 '씨……. 늦었다. 알람을 왜 못들었지?'


맥 빠진 눈꺼풀을 올려, 휴대폰 시계를 한번 쳐다보고는, 돌아누워 아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포근했다. 딱 5분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어나보니 아내는 나가고 없었다. 베개에 붙어있는 아내의 머리카락을 잠이 덜 깬 손가락으로 돌돌 말아보았다. 여느 때 같으면 잠들기 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이 침실에 있어야 할 텐데, 철야근무에 그 시간을 빼앗긴 나는 한 낮에 아내의 머리카락만 만지작 거리고 있는 것이다. 여행이 기억과 꿈으로 엮어낸 이야기에 취한 듯 멍한 표정으로 꿈 속의 장면들을 다시 떠올려보고 있었다.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나올 리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은 그 답을 한참 동안 찾아 보았다.


'아, 알람이 들렸구나!'


불현듯 떠올랐다. 마차푸차레가 흔들려 두 동강이 났을 때, 그때 알람이 울렸다. 레 궁전이 잿빛 먼지 속으로 가라앉을 때, 바로 그때 알람이 울렸던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 기상 알람과 진동이 그렇게 여행을 무너뜨렸다. 철야 후의 달콤한 잠도, 뭉근한 쾌락도, 충만한 여행도, 담담한 꿈도 빌어먹을 알람이 모든 것을 절단낸 것이다. 이런 썩을 놈의 알람. 어색하게 느껴지는 작은 침실 속 늦은 오전에 나는 꿈 속 여행이 침대 위에 쏟아낸 멍한 기운을 덮은 채, 눈을 꿈벅꿈벅이며 그렇게 알람을 원망하고 있었다.


하......출근......


출근해야 한다. 한숨이 푹 나왔다.


그런데......


왜 아내의 이름이 영은이었지?


오늘 아내의 얼굴이...... 얼굴을 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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