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기 Apr 18. 2017

"존재의 리얼리티를 직시하라."

일상이 여행인 삶을 살기 위해

   강물이 흘러갔다. 


녹황색이다. 그 빛깔이 좀 낯설다.

그 옆에 커다란 나무가 서 있다. 덩치가 큰 몸뚱이 위로, 그 안에 토토로가 세 마리 정도는 살고 있을 법한 무성한 가지들이 하늘을 받치고 있다. 튼튼한 팔뚝이 길 건너 한 레스토랑까지 뻗어있다. 그 큰 나무가 ‘여기로 들어가 봐.’라고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루앙프라방. 난 아팠다. 병원에 갔다 와서 여행에 대한 별다른 의욕이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기였다. 숙소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한국에서 가져온 책 한 권은 이미 다 읽어버렸고, 다른 책을 더 읽고 싶었다. 루앙프라방에 한국 레스토랑이 하나 있다는 걸 알고 거기에는 책을 찾으러 갔다. 메콩강변의 커다란 나무가 가리키고 있는 곳. 그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후지와라 신야를 처음 만났다.


  레스토랑은 깔끔한 인테리어에 멋진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갤러리 같은 느낌이었고, 그에 걸맞게 정갈한 한식 메뉴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행지에서 가게 되는 한국음식점은 배낭여행자들에겐 좀 부담이 되는 가격이다. 내가 원한 게 한국음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거기에 내가 읽을 수 있는 한국어 책이 있는데. 아마 김밥을 주문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레스토랑을 안을 어슬렁어슬렁 구경하다가 책장 앞에 섰다. 그리고 책 하나를 들었다.


‘메콩 강인가?’ 

어둑한 표지 사진에도 황량한 강이 흘러가고 있었다. 


'황천의 개'.

 후지와라 신야. 


황천은 저승 가는 길에 건너는 강이 황천이 아닌가. 이 강을 황천으로 보았나?

책을 펼치니 이건 인도여행기다.

메콩이 아니라 갠지스구나.

책을 자리에 가지고 와서 읽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해가 기울고 메콩 강이 그 낯선 빛깔을 숨기고 적막에 덥힐 때까지, 나는 후지와라 신야가 노를 저어 가는 작은 보트를 탔다. 그가 노를 한 번씩 저을 때마다 나는 한 장씩 책장을 넘기며 라오스의 메콩 강에서 인도의 갠지스 강으로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후지와라 신야. 그는 일본에서 인도 여행의 첫 주자라고 할 만한 여행자이자 사진작가였다. 비틀스가 인도에 갔던 60년대 말, 후지와라 신야도 인도로 간다. 여행 후 ‘인도방랑’이라는 책을 썼고 그 책으로 일본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몇십 년 후, 인도를 여행하고 와서 일본에 큰 파장을 일으킨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이다. 그는 1995년 도쿄의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하여 5000명 이상 피해를 입고, 12명이 목숨을 잃게 만든 사람이었다. 후지와라 신야는 ‘황천의 개’에서, 그와 자신의 접점인 인도와 그가 태어났고 자랐던 일본의 도시와 사회를 가로지르며 탐사취재 형식으로 이야기를 밀도 있게 끌고 나간다. 거기에 중간에 삽입된 그로테스크한 신야의 사진들은 그의 글과 완벽하게 일치하여 독서의 감각을 한층 더 자극시킨다. 거기에 자신이 인도 여행에서 겪었던 공중부양의 실체, 마약으로 자신을 잃고 방황하는 친구, 모래로 그린 만다라에 관한 이야기 등 망상 속에서 생생하게 겪은 여행의 에피소드들을 엮어가며 ‘존재의 리얼리티를 직시하라’는 성찰적인 주제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의 글은 날이 선 칼날로 생살을 베어 그 단면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그 날이 너무 예리하여 피도 흐르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러한 문체는 읽는 이가 몰입하여 자신의 온기를 온전하게 체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강물이 흘러간다. 


그 위로 물안개와 시체를 태운 연기들이 뒤엉켜 뭍으로 퍼지고 있다.

바라나시. 나는 갠지스 강 가트에 앉아 화장터를 구경하고 있다. 40여 년 전, 저 강 건너편으로 갔던 후지와라 신야는 떠내려 온 인간의 시체로 굶주린 배를 채우는 개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리고 그 죽음의 대치 상황에서 도망쳐 나와, 무無의 즉물적인 가루가 된 인간의 재를 맛보았다. 아무 맛도, 아무 냄새도 나지 않던 그 재를 혀 위에 올려놓아본 신야는 ‘즉신성물(卽身成物). 몸이 곧 물질이 된다.’라고 말한다. 인도라는 나라도, 인간도 망상과 관념을 벗어놓고 보면 그저 물질일 뿐이라는 것. 


나는 이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갠지스와 화장터는 신성하고 영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부처는 갠지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갠지스 강이 그렇게 신성한 것이라면 그 속에 사는 물고기가 제일 먼저 해탈해야 되는 것 아닌가라고. 거기에서 신야는 즉신성물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즉신성불(卽身成佛). 몸이 곧 부처가 된다.’는 말을 변형시킨 것이었다.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지’, ‘신과 영혼의 나라’ 등 인도를 포장하는 온갖 말들은 내겐 별 관심사가 아니었다. 인도를 여행하면서도 그런 것들을 찾으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그것보다는 황천의 개에서 읽게 된 ‘존재의 리얼리티를 직시하라.’는 후지와라 신야의 말이 더 와 닿았다. 그게 자아를 찾는 것일 수도 있고, 영혼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관념적인 것이 아닌, 지금 내 몸의 감각이 직접 접촉하고 있는 물질들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 정도였다. 그저 있는 대로 보겠다는 태도.


시체가 타고 있구나. 사람들이 목욕을 하는구나. 

소도 같이 하는구나.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라씨가 맛있구나. 해가 지는구나. 

공기가 선선하구나. 배가 고프구나. 

머리가 아프구나.

갠지스 강가에서 나는 후지와라 신야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분이 평온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황천의 개’를 다시 한번 읽었다.

여기서 읽은 ‘황천의 개’는 여행에서의 인도를 떠올리게도 하였지만, 패전 후,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 아래 급속도로 변화하게 된 일본 사회와 그 속에 나타난 폐단과 부정적인 현상에 더욱 주목하게 하였다. 그 일들이 비단 일본의 문제가 아님이 자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강물이 흐르고 있다. 

메콩강도 갠지스강도 아닌 서울 한강. 이 도시를 관통하는 거대한 검은 주단. 한 밤의 한강 주위로 화려한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다. 이 속에서 내 주변을, 내가 만지고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의 노동이 만든 물건들은 내가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상품으로 변해버리고 나는 그것을 갖지 못한다. 그것들의 질량과 부피를 느낄 수 있는 길은 너무나도 요원하다. 그 소외감으로 텅 빈 마음을 우리는 내 욕망이 아닌 욕망으로 이것저것을 사들이며 채우려 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너와 나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자신만의 창문인 모니터와 스마트폰만 응시하고 있다. 바로 내 앞에 사람이 있는데 보지 않는다. 바로 곁으로 바람이 불어오는데 느끼지 못한다.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라도 들렸으면 좋겠다. 


존재의 리얼리티를 직시하는 것. 즉 지금 내가 여기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무엇을 보고 있고, 내 뺨에 닿는 바람은 어떤 느낌인지 제대로 느끼면서 살고 싶다. 머나먼 여행지도 좋지만 바로 지금 여행을 하듯 동네를 산책한다. 신비로운 이상향을 찾는 게 아니라 바로 일상 속에서 나를 알아차리고자 한다. 남이 원하는 소비에 휘둘리지 않고 단순하게 내 욕망을 직조해 간다. 나의 호흡으로 나의 길을 걸어간다. 그게 내가 살고 싶은 삶이다. 넘어질 때도 있겠지만, 넘어지면 어디가 아픈지 잘 챙겨보기로 하고 또 그렇게.




매거진의 이전글 낯선 소리가 들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