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을 위하여

<여름,> 이소영

by 키키

싫은 게 참 많은 사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마음속으로는 선을 세게 그어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 다짐하는 그런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많고 많은 싫음의 카테고리 중에서 계절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봄을 가장 싫어했다. 새 학기의 들뜬 분위기. 그 속에서 혼자 쭈뼛거리는 내 모습을 매일 자각해야 했던 시간. 겨울보다 덜 추울 뿐, 여전히 서늘한 공기와 변덕스럽게 내리는 봄비. 내게 봄은 새로운 시작이 주는 불안과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이 가득한 계절이었다. 봄을 싫어했던 이유는 더 있지만, 이만 줄여야겠다. 이 글을 읽는 ‘봄’이가 속상할 수도 있을 테니.

봄은 내 아이의 이름이다. 나는 가장 싫어하던 계절의 이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했다. 그저 어감이 예쁜 외자 이름을 지어 주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엄마 내 이름은 왜 봄이야?” 느닷없는 아이의 질문에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답했다. “봄은 진짜 힘이 세. 꽁꽁 언 땅도 녹이고 땅속에서 잠자고 있던 모든 것들을 깨어나게 해. 그리고…다정하고 따스하잖아. 그런 모습들이 봄이랑 닮아서 봄이라 이름 지었지.” 그날 밤, 자려고 누워 그 상황을 곱씹어 보니 내 대답은 순발력으로 번뜩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수천 번, 수만 번 “봄”을 소리 내어 부르며, 씨앗처럼 작았던 아이가 무성하게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봄이라는 계절이 지닌 천진함과 생동성, 다정함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내 안에 쌓인 봄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꺼내어 말한 것이다. 꽃샘추위처럼 휘몰아쳤다가도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내 마음을 녹여버리는 봄. 그렇게 변덕스러운 모습까지도 아이는 봄과 꼭 닮았다. 가끔은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변덕스러우니까 봄이지. 그런 봄을 사랑하지.’ 봄의 변덕스러움 마저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다니. 아이를 키우며 그렇게 마음 안에 그어진 진한 선 너머로 종종 넘어 다녔다. 좋고 싫음의 경계가 희미해고, 싫음의 반대편으로 발 디딜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싫어하는 계절을 물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 모아 여름이라 말한다.

내가 봄의 이면을 발견했듯, 여름의 이면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에서 한정원 시인은 여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첫눈 같은 것은 여름에 없지

첫 땀 첫 수국 첫 매미 첫 소낙비

환호도 그리운 약속도 없도

(중략….)

적설 같은 것도 여름에 없지 흐르고 흐르고 아무것도 쌓이지 않지


환호도 그리운 약속도 없는 흐르고 흘러 모두가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는 계절, 여름.

작가는 이어 말한다.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

그렇다면 여름의 무엇을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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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 작가는 그림책 「여름, 」을 통해 여름의 면면을 쓰고 그렸다.

책 속에서 여름은 숨 막히는 붉은 색, 끈적이는 젤리 덩어리처럼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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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하고 사람들에 딱 달라붙으니 ‘끈적이는 풀, 물먹는 하마, 칭칭 감기는 물뱀, 질질 끌리는 모래주머니’란 표현을 들을 수밖에 없다. 한낮의 도심은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무한 복사해대고, 해가 진 밤에도 가시지 않은 더위에 사람들은 쉬이 잠들지 못하는 모습이 연이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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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풍기를 든 여자의 머리칼이 너풀너풀 흩날리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어서 시간이 흘러 여름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여름을 사랑한다는 건 역시나 힘든 일일까. 뜨거운 더위에 몸마저 녹아내리며

“이제 그만.”을 외치는 순간, 그제야 창 너머로 여름의 또 다른 이야기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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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추라고 여름은 더웠고, 눈을 살포시 감아 보라고 여름 해는 뜨거웠으며,

들어와 쉬라고 여름 나무는 무성했다는.’


그렇다. 여름은 앞만 보고 걷는 사람들을 기어코 멈춰 세운다.

‘여름 방학’, ‘여름휴가’라는 핑계를 대고 잠시 쉬어가라고 일상에 틈을 내어 준다.

평소에 살피지 않았던 여름의 또 다른 면을 들춰본다. 해가 조금 더 하늘에 머무는 만큼, 저녁의 시간을 길게 늘여 쓸 수 있는 계절. 부서지는 파도 속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 수 있는 계절. 달콤한 과즙을 가득 머금은 갖가지 열매들을 마음껏 베어 물 수 있는 계절.

‘여름은 만끽하는 계절이 아닐까.’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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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멈추었던 그림책의 페이지를 넘긴다.

사람들은 여름의 빛을 듬뿍 쐬며 온몸을 여름 색으로 물들이고,

여름 비에 몸을 식히며 즐겁게 뛰어논다. (물론 아이들만. 어른은 비를 피해 뛰어간다.)

그렇게 모두의 기억을 머금고 점점 높아진 여름은, 뜨거운 열기를 한껏 품은 여름은,

달콤한 열매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 한 아이가 달콤한 복숭아를 베어 물며 말한다.

“달다, 여름.”




「여름, 」을 읽고 나니, 마음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싫어한다고 여겼던 어떤 대상에게서 이외의 면을 발견한 적이 있나요?’


「여름, 」에서 무더운 여름에 숨겨진 쉼과 달콤함을 발견했듯,

‘싫다’여겼던 대상에서 괜찮은 구석 하나를 함께 찾아보자고 말하고 싶다.


‘싫다’는 말은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어 버리는 말이다.

그 선들이 많아질수록 발 디디고 서 있을 수 있는 땅은 조그마해 진다.

조그만 네모 안에 가만히 서서 네모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다정한 시선을 건네기를 거둔다면 삶이 얼마나 얇고 지루해질까. 엄청나게 싫은 것들은 어쩔 수 없지만, 조그마한 싫음에는 여지를 주며 살고 싶다. 미처 들춰보지 숨겨진 구석에서 좋아할 수 있는 부분 하나쯤 찾아내어 기어이 좋아해 주고 싶다.


그렇게 품을 넓혀가며 살아간다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달다,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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