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했던 긴 겨울의 끝은 푸른빛 가득한 이파리들과 만물의 역동성으로 앙상했던 가지를 채워 감으로써 그 시작을 힘차게도 알렸다. 그와 함께 겨우내 국방의 의무로 나라에 최선을 다 하고 있던 나 역시 복사꽃의 개화와 함께 사회로 돌아왔고 아직은 그 속에 온연히 적응하지 못한 어수룩한 티가 묻어나는 짧디 짧은 머리로 그간 만나지 못 했던 반가운 주변 분들을 만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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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커피를 좋아해 카페를 자주 방문하던 나는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카페를 들어갔고 오늘날의 그녀를 만났다. 갈색으로 염색한 긴 생머리와 기본 티에 청바지, 편한 차림의 그녀에게 우습도록 서툰 말로 먼저 다가갔고 조급하지 않은 둘의 성격은 꽤 긴 시간이 흘러 열대야가 시작될 무렵 연인 사이로 발전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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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소중함을 알았기에 더위가 육중하다고 느껴질 만큼 햇볕이 강하게 내려오는 날도, 하늘이 너무 높아서 닿을 수 없을 것 같아 떨어지는 낙엽을 매만지던 날도 우린 함께 했다. 계절이 지나감에 있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변화하는 모습과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본연의 성향을 보며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신기하게도, 진실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의 일반적인 행동 하나에도 사랑이 깊어지고, 작은 것 하나에도 크게 감동하게 된다. 가령 그녀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나 이젠 가을이라며 활짝 웃던 모습이 내겐 그랬다. 그녀 역시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나를 사랑으로써 감사 주었다. 그렇게 그녀와 나의 시간은 행복의 연속으로써 자연스레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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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카페에 앉아 그녀를 유심히 지켜봤다. 커다란 눈망울이 나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이 보였다. 행복했던 기억과 심하게 다퉈 서로에게 상처를 줬던 날들이 빠르게도 스쳐 지나갔다. 꽤나 추워진 날씨에 건조한 입술로 나를 보며 웃어주는 그녀를 보고 나도 함께 웃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녀의 얼굴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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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계절의 변화 속 한겨울의 시작과 함께 그녀의 성격 또한 점점 변해갔다. 작은 행복에도 감사할 줄 알던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일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넘겼고 더욱 큰 것을 원해갔다. 서로를 존중해 주자며 늘 하던 다짐은 초봄의 눈처럼 없어져가 점점 이기적으로 행동했고 불만은 항상 늘어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서로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지 수십 번을 생각하며 개선할 수 있는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부쩍 쌓여가는 나쁜 기억들이 그동안 쌓아 놓은 추억의 성을 무너져 내리게 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렇기에 하루 종일 관계의 개선을 생각했고 스스로에게 애원했지만 끝내 변하지 않는,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불만이 쌓여갔다.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였고 서로를 향해 상처를 주었다. 그녀의 큰 눈망울에는 분노와 차가움이 가득했고 나 역시 그 눈을 읽으며 입으로 큰불을 뿜고 있었다. 그렇게 다툼의 연속과 함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아직 이파리를 채우지 못한 때 그녀와 나는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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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는 시간은 꽤 길다. 그 하루라는 시간이 모여 몇 개월이 지난 지금의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늘 그녀를 생각 한 건 아니지만 소홀히 했다면 거짓말이다. 그녀에게서 나는 행복을 선물하는 방법과 행복을 받는 기쁨을 선물 받았고 깊은 다툼 끝에 상처 주지 않는 법과 상처받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지금의 그녀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있고 어두운 밤의 달 한 조각처럼 고맙고도 닿을 수 없는 존재이다. 당신과 사랑하던 그와의 이별과 상처를 트라우마로 생각하기보단 좋은 경험과 배움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사랑’은 비효율 적이기에 늘 사랑받고 행복할 수는 없다. 그럼에 상처 또한 사랑이며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