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 그리고 가치 있는 것들로 내 삶을 꾸려 나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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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친구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놀러온다는 소식을 주위에 알리면, 주변 친구들은 "샌프란 뭐 볼 게 있다고 오나"라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 내 주변 많은 친구들에게 샌프란은 "심심한 동네"이다.
하지만 막상 다들 스케쥴을 보면 각자가 채워넣은 일상들로 꽤 바쁘다.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는 1주일에 테니스, 골프, 필라테스로 한 주를 꽉 채운다. 집돌이/집순이들은 자기 취향껏 집을 꾸민 후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홈파티를 연다. 사업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은 해커톤에 참여하거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기도 하고, 기술공부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은 짬짬이 요즘 뜨는 핫한 기술들을 공부한다. 깊게 봉사활동이나 종교활동을 하는 친구도, 찐하게 연애를 하는 사람도 다들 분주하게 살아간다.
그렇다면 왜 다들 바쁜 삶을 살면서도 샌프란은 "심심한 동네"이고, 서울이나 뉴욕과 같은 대도시의 삶을 그리워할까? 내 주변 젊은 직장인들이 주로 불평하는 점들을 들어보고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 집 근처에 예쁘거나 맛있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음식점, 바, 카페 등 문화시설이 적고
- 높은 성비 불균형
- 샌프란 도심에 상대적으로 나쁜 치안
- 높은 물가와 세금
많은 사람들이 커리어가 아니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는 건, 거꾸로 일이 끝나고 돈과 시간을 쓸 문화시설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SF Bay Area가 넓은 땅덩어리에 퍼져 있고 인구도 적을 뿐더러, 임대료/인건비/세금이 높다보니 문화시설을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돈 되는 장사"를 하기 어려울 것 같다. San Francisco, East Bay, South Bay에 있는 회사들, 주거시설, 기타 문화시설들이 모두 San Francisco에 밀집해 있다면 샌프란시스코의 일상은 꽤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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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의 문화시설들이 적다면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은 주로 일이 끝나고 어떻게 일상을 보낼까? 3년 정도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Tech Community 버블에 쌓인 삶을 기준으로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액티비티와 홈파티를 더 많이 하는 편이다. 같이 운동을 하거나 홈파티에서 처음 만나서 사람들과 친해지는 경우가 많고, BBQ 파티나 오픈 네트워킹 파티에서는 낯선 사람들과 새로이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 하이킹, 골프, 테니스 등 야외 액티비티
- 요가, 필라테스, 클라이밍 등 실내 액티비티
- 홈파티, BBQ 파티
- 오픈 네트워킹 파티
- 여행
공휴일이 주말에 껴 있는 롱 위켄드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가까운 혹은 멀리 있는 지역으로 여행을 가고, 땡스기빙부터 연말/연초까지 회사 Shutdown 기간에 개인휴가를 붙여서 한국이나 다른 지역으로 긴 시간 여행을 가곤 한다.
앞서 대중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하는 활동과 달리 사람들 각자 취향에 따라 더 깊게 파고 들어가는 활동들도 꽤 있다. 샌프란시스코를 둘러싼 자연경관으로 떠나는 캠핑이나, 나파벨리의 유명한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와인 테이스팅 모임 등 샌프란시스코 특색이 많이 묻어 나오는 활동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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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이사를 와서 여러 모임에 참석해보고 여러 활동들을 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쌓아 나가고 샌프란시스코 생활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여러 활동을 하면서 제일 좋았던 점은 내게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다 뚜렷해진 점이다. 일이 끝나고 내게 주어진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되돌아보며, 거꾸로 내게 무엇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시도해보지 않고 머리 속으로만 막연히 상상해보지 않았기에 구체적일 뿐더러, 남들이 한다고 해서 막연히 부럽고 동경하지 않아 단단해지는 것도 나이를 먹으며 즐거워지는 지점이다. 마음을 열고 호기심은 가지되,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막연한 동경에 갇히지 않으면 내게 가치 있는 것들을 쌓아올리는데 더 밀도 있게 시간을 쓰고 삶이 풍성해질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샌프란시스코도 더 이상 "심심한" 동네로만 남지 않게 되고, 내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들과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공간으로 동네에 더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거창하게 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일상이 그리 특별한 건 아니다. 회사에서는 일을 하면서는 기술이나 사업이 미래를 어떻게 바꾸어가는지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가지고 살고, 일이 끝날 때면 새로운 사람들, 컨텐츠, 공간과 연결되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넓어지는데 큰 만족감을 느낀다. 예전과 달리 남들과 꼭 함께 하지 않아도 혼자서 재즈 공연이나 연극을 보러 다니기도 하고, 테크 컨퍼런스나 밋업에 참석해서 새로운 트렌드와 기술들에 배워 나가기도 한다. 뉴스들과 칼럼을 보면서 미국/한국 사회에 대해서 계속 배워나가는 즐거움도 크고, 사람들과 밀도 있고 깊이 있는 대화가 이어질 때는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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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샌프란시스코가 내게 "심심한" 동네가 되어 훅 떠나버리고 싶은 욕구가 드는 날이 올 수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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