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earl
뭘 먹어도 지루한 일요일 점심, 나는 라면에 계란을 넣을지, 치즈를 넣을지 고민 중이었다. 그때, 식탁 위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뜻밖의 문자. 보배였다. 보배는 유명 패션잡지 기자로 희주 생일 파티에서 처음 만났다.
4월의 좀 서늘한 오후, 강남역 4번 출구 앞에서 우면동 쪽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폰으로는 카티아노 벨로주의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여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또, 도를 아십니까냐?'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듣기 좋은 허스키 보이스가 "안녕하세요, 희주네 가시죠?"라고 물었다. 내가 '누구세요'라는 표정을 짓자, 전에 희주와 내 공연에 갔었다고, 인사도 나눴다고 설명을 한다. 나는 사람보다 더 먼저 눈에 들어온 그녀의 형광색 플랫슈즈를 칭찬했다.
"아, 안녕하세요. 신발 참 근사하네요."
나는 한국식으로 변형된 파티 문화가 거북하다. 그냥 일대일로 알아서 분위기에 맞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주파를 던지는 것이 서양식인데, 그게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다수 대 주도적 한 사람의 대화로 변질됐다. 주도적 한 사람의 이야기가 지루하거나, 관심 밖이어도 멍청하게 듣는 척을 해야 하니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날도 상황은 비슷해서, 나는 슬쩍 자리를 피해 테라스로 나왔다. 서울 하늘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별이 선명하게 보였다. 희뿌연 담배 연기를 눈앞으로 뿜으니 어쩐지 좀 더 현실감이 생겼다.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칠레 와인 두 잔에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보배였다. "좀 센 건데..." 하며 나는 얼마 전 일본여행에서 사 온 말보로 레드를 건넸다. 나라마다 같은 브랜드 담배라도 니코틴 함량이 조금씩 다르다. 일본은 한국보다 2미리 정도 더 들어있다. 머리가 핑 도는지, 보배는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얼굴에 대고 담배 연기를 뿜었다. 불에 타는 듯한 진한 장미잎 냄새에 나도 괜히 아찔해졌다. 샤넬 코코 마드모아젤...
삶에 계획된 우연은 없다. 의도된 필연만 있을 뿐. 만남은 우연이지만, 관계는 의도다. 자리가 파한 시간에 지하철은 이미 끊겼고 각자 방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택시를 잡아탔다. 보배는 대학로, 나는 망원이었다. 딱히 방향이 맞진 않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단둘이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할 말도 없어서 나는 집에 가는 내내 창밖을 바라봤다. 센스가 없는 건지, 택시기사는 망원동을 먼저 들렀고, 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지갑에서 만원 짜리 두장을 꺼내 보배에게 건넸다. 택시가 출발하기 전에 창이 열리더니 만원 짜리 두장이 창밖으로 떨어졌다. 창에서 바닥까지의 거리를 비웃듯, 중력을 거스르듯, 아주 천천히.
문자는 '오늘 쉬는 날, 교보에 갈 거고, 이리 올 일 있으면, 커피나 한잔 합시다.'라는 내용이었다. 사실과 가정과 권유가 적절히 섞인 문자. 나는 문자를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끓는 물에 양파를 썰어 넣고, 건더기 수프는 쓰레기통으로, 분말 수프는 2/3만 넣고, 면을 넣은 뒤 2분 30초 타이머를 눌렀다. 냉장고 안에는 치즈도 계란도 없었다. 뜨거운 김을 마시며 기침도 몇 번 해가며 라면의 2/3쯤을 천천히 비운 뒤 답장을 했다. "커피 좋지요."
대형 서점은 어떤 책에게는 놀이터지만, 어떤 책에게는 관이다. 신나게 놀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갈 수도 있지만, 내내 한 곳에 꽂혀 생을 마감하는 책도 있다. 얼마 전에 발간된 내 수필집도 스스로 수의를 짜고 있는 듯이 보였다.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이라면 어느 코너에서라도 만나겠지 했지만, 보배와 마주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펜을 사러 들어와 있어요."라는 문자가 왔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서촌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걸었다. 보배는 요즘 생긴 어떤 카페를 아냐고 물었고, 그 카페는 내가 썩 좋아하는 류의 카페는 아니었다. 세련됨의 총합이 반드시 아름다움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주는 카페들. 그런 카페들이 울타리 너머 봉봉을 타는 아이들처럼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말라비틀어진 유칼립투스가 가장자리에 꽂혀있는 메뉴판을 보고, 카페모카 아이스를 시켰다. 보배는 목이 마르다며, 맥주를 시켰다. 맥주라... 나도 금세 마음이 바뀌어 레페를 주문했다. 보배는 고민 끝에 에스프레소 비어를 시켰다. '아, 정말 이도저도 아닌 메뉸데 그건...' 병에 든 레페가 먼저 나왔고, 나는 시원하고 부드러운 흑맥주를 마셨다. 이미 맛을 알고 있는 공산품에는 실망하지 않는다. 때론 맛있기까지 하고. 6월의 미적지근한 바람이 열린 창을 통해 들어왔다. 보배는 에스프레소 비어가 미지근하다며 투덜댔고, 묻지도 않고 내 레페를 마셨다.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다가, 어린 시절 얘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한번 보고 말 사람끼리 나누는 대화의 소재가 아니다. 적어도 나한테는. 지는 해가 자꾸 눈을 찔러 의자를 옮기다 보니, 보배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다. 단지 팔을 뻗을 이유가 아직 없을 뿐. 잠시 후 기본 안주로 나온 과자 부스러기가 보배의 스웨터 목덜미 부분으로 떨어졌고, 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부스러기를 떼어내 내 입으로 가져왔다. 보배는 눈이 부신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내가 맥주값을 계산하자, 보배는 저녁은 자기가 사겠다고 말했다. 저녁도 같이 먹겠단 말인가?. 바깥공기가 차지도, 배가 출출하지도 않아서 좀 더 효자동 거리를 걸었다. 서울에서의 2년을 말해 뭐 하랴. 어느 것 하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찾기 힘들다. 모택동 초상화가 벽에 걸려있던 닭칼국수 집이 도미노 피자로 바뀌어 있었다. 목적 없이 걷다 보니 수성동 계곡 꼭대기까지 걸었다. 앞장서서 걷는 보배의 발목은 얇았고, 저 얇은 발목을 접질리기라도 하면, 내가 업고 여기를 내려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수성동 계곡 끝과 다시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뒤를 돌아보니, 종로의 밤거리가 내려다 보였다. 허탈한 건지 배가 고픈 건지 알 수 없었다.
"우동 드실래요?"라고 말하며 보배는 친숙하다는 듯이 어느 허름한 가게로 나를 안내했다. 작은 가게 내부를 가로질러 긴 바가 있었고, 가슴이 두드러지는 회색 스판셔츠에 검은색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자의 옆 실루엣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바를 지나자 1평이 채 될까 말까 하는 방이 나왔고, 2인용 테이블 3개가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 곧, 주문을 받으러 온 점원이, 주문을 받기 위해서라기엔 너무 지나칠 정도로, 빤히 내 얼굴을 쳐다봤다.
"혹시, 조지오님 아니세요? 공연장에서 뵌 적이 있는데...'
공연장에 오는 몇 안 되는 관객의 얼굴쯤은 다 기억하고 있는데,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주저하자, 상대가 먼저 그 푸른 별에서... 라며 말을 흐렸고, 나는 필사적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아, 수진씨!"하고 점원의 이름을 떠올렸다. 수진은 보배를 힐끗 쳐다보고 주문을 받아 갔다. 곧, 주문하지 않은 바나나 튀김과 주문한 우동 두 그릇이 나왔다.
"바나나 튀김은 제가 드리는 거예요."라고 수진이 말했고,
"와, 유명인이랑 다니면 이런 게 좋네요."라고 보배는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말없이 우동 면발을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지오씨는 보통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평범치 않은 질문이자, 목적도 분명치 않은 질문. 나는 나를 가장 보통의 인간이라 생각한다. 내 주변 사람들 의견은 언제나 정 반대에 가까웠지만. 어렸을 때부터 특이하단 말을 많이 들었다. 특이함이라고 순화할 필요도 없이 '너 또라이 아니냐?'라는.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떼, 보습학원 창 밖으로 한 팔에 의지해 매달려 있었던 적이 있다. 2층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또래 친구와 팔힘자랑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온 영어 선생의 눈에 띄기 전까지는 모든 게 괜찮았다. 영어 선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팔에 힘이 풀렸고, 그대로 보도 블록 위로 떨어져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어머니가 보습학원에 불려 왔고, 영어 선생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나는 푹푹 찌는 여름날 한쪽 다리 전체에 깁스를 한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고 3 야자 쉬는 시간이었다. 의례 몇몇이 으슥한 곳에 모여 10분간의 흡연을 만끽하고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고,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교실 뒷문을 최대한 조용히 열고 들어갔지만, 곧, 담임과 아이들의 놀란 눈과 마주쳤다. 거울을 보니, 이마에서 붉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에 놀라 담을 넘어 도망치다 그대로 머리부터 아스팔트 바닥으로 고꾸라져 30분간 기절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학교에 불려 오셨고, 나는 운 좋게도 야자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런 사건들 후로도, 내가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음악을 한다고 하고, 결혼 날짜까지 잡은 여자와 사랑을 들먹이며 헤어지자, 주위 사람들은 나를 더 이상 보통 사람의 범주에 넣어주지 않았다.
"저는 제가 가장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지오씨는 예술가잖아요. 이미 보통 사람은 아니죠."
"세상 사람들을 총 10명이라고 놓고, 6명은 회사원, 3명은 자영업자, 1명은 예술가, 이렇게 평균을 내서 보통 사람을 수치로 정의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는 대답에 보배는 웃었다.
잠시 화장실을 가려는데, 수진이 말을 걸었다.
"여자친구 분인 줄 알았는데, 인터뷰하시나 봐요?"
"인터뷰는 아니고, 친군데, 기자예요."
나는 내 직업이 적어도 평상시에는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별로 유명하지 않는 인디 음악가를 알아보는 오늘 같은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우동집을 나와서도 우린 계속 걸었다. 통인동은 그런 곳이었다. 계속 걷게 만드는 곳. 그 길이 집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곳. 아니, 통인동보다는 서울, 타지가 그런 곳일까. 누구도 아무도 없는 차가운 바닥으로 혼자 걸어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차라리 기어들아갈 망정... 어느 주막 골목을 지나는데, 최백호의 '부산의 가면'이 흘러나왔다. '모스트 원티드'라는 익숙한 간판이 보였고,
"저 집은 토마토를 꽃잎처럼 얇게 썰어 그 위에 발사믹과 치즈를 올려주는데 참 별미예요. 언제 시간 나면 한번 드셔보세요"라고 내가 말하자,
"그럼 지금 들어가서 먹고 갈까요?"라고 보배가 말했다.
카페에서 서로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고 말한 상태였지만, 우리는 곧, 토마토 안주의 바닥을 젓가락으로 긁으며 참이슬 두 병을 비운 서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보배는 회사생활 스트레스와 자신을 사랑하는 두 남자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그저 간간이 술잔을 꺾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산 갈래요?" 내가 잠시 망설이자,
"에이, 농담이에요."라고 보배는 술잔을 응시했다. 순간, 처음으로, 나는 보배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카페에서도, 우동집에서도, 술집에서도 지나가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보배를 힐끗거렸다. 빛바랜 낡은 코트와 핑크빛 우산의 조화.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24살 여름, 어느 날. 어느 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특별한 날이었다. 다음날이 입대일이었으니까. 나는 머리에 비니를 무겁게 눌러쓰고, 강남의 한 포차에서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미주와 둘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취한 미주는 자신의 남자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오늘 너랑 잘 예정'이라고 꼬부라진 혀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보다 7살이나 많은, 독일에서 생의 반을 넘게 살다 온 여자. 여자이긴 하나 여자의 범주에 넣고 있지 않았던.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발도 제대로 못 겨누는 미주를 들쳐없고, 끊임없이 집주소를 물었지만(미주의 집 근처에서 술을 마셨으므로), 끝내 택시! 택시! 만을 외치던 미주. 뜨끈한 입김이 귀를 계속 자극하던 그 순간이 지나고, 택시를 가까스로 잡아타고, 제일 가까운 호텔에 내려, 호텔비를 계산하려던 미주의 지갑은 텅 비어 있었고, 다음날 군대에 들어갈 내 지갑도 같은 처지였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다리를 건너 장충동의 어느 여관 골목에 내렸다. 미주를 들쳐없고 빈방을 찾아다니다, 여관 주차장을 가로막고 있던 쇠사슬에 걸려 그대로 무릎부터 떨어졌다. 미주를 필사적으로 업고 있으려 했고, 내 무릎은 안중에도 없었다. 예기치 않은 내 기사도에 스스로 놀랐다. 무릎이 찢어진 베이지색 면바지는 점점 붉게 물들어 갔고, 흐물거리는 웃음을 짓는 늙은 여자가 카운터를 보던 3만 원짜리 여관방에서, 미주는 내 등에 업혀 침대방! 침대방! 을 외쳤으나, 우리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식은 바닥에 얇은 요 하나를 깔고 누웠고, 미주가 골아떨어지자 나는 화장실에 가서 무릎을 씻었다.
"그만 나가죠."
"대학로요." 택시기사에게 보배가 말했다.
"오늘밤 나랑 놀래?" 서른 중반의 전문직 여성 입에서 나온 말치곤, 너무 적나라했다.
내 손 위에 얹어진 그녀의 손이 거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