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따끈한 어묵탕과 데운 청주 한잔
어제는 작은 방에 오랜만에 객이 있었다. 객과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객은 수녀가 될 생각이 있다고 했고, 나는 우리 집의 첫 손님이 비구니 스님이었다고 했다. 밤에는 바람이 심해서 객도 나도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아침이 몽롱했지만, 커피를 내리고, 아침을 냈다. 그리고 거의 오전 내내 뻗어 있었다.
이번에 중고로 장만한 작업실의 가스 난로는 따뜻하지만, 가스 냄새가 심하게 난다. 그래서 창고에서 기름 난로를 꺼냈다. 녹을 닦고, 분해를 하고, 기름칠을 하고, 지난 겨울 쓰다남은 기름을 채워 불을 지폈다. 그리고, 양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 그 위에 올렸다. 역시 난로 위에는 주전자가 올라가야 그 모습이 완성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역시 기름 냄새가 난다.
조수리 정식에서 든든한 한끼를 먹고, 우뭇가사리로 만든 빠삐꼬 맛의 디저트도 얻어 먹었다. 12월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12월에 하는 공연에는 매년 부담감을 느낀다고 이야기했다. 연말 공연은 뭔가 특별해야할 것 같아서...
집에서 밀린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망원동 시절부터 알고 지낸 동갑내기 친구 두연이다. 히트텍이 든 봉지를 내민다. 내복. 나는 커피를 한잔 내려주고,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한다. 그리고, 또 서울에서 온 손님 3명이 방문했다. 또 커피와 차를 내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3일 째 비박을 한 상태라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들의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비염환자니,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문득, 나는 제주에 왔다고 나를 방문해 주는 손님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사람을 맞는 일이 매번 반가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손님 응대 같은 걸 잘하는 편도 아니다. 그저 차 한 잔 내주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런 응대에도 어떤 이들은 나를 다시 찾아주고, 내복을 싸들고 오고, 편지를 써주고, 포옹을 남기고 떠난다. 아마 이런 것들이 내가 제주의 겨울을 날 수 있게 해주는 힘들일 것이다. 마치, 작은 손난로처럼.
무를 썰고, 다시마를 자르고, 국물용 멸치를 냉동실에서 꺼내, 물을 넉넉히 부은 냄비에 넣는다. 물이 끓으면, 다시마를 건지고, 멸치 국물은 좀 더 우린다. 멸치도 건져네고, 간장과 청주로 간을 하고, 칼칼함을 위해 청량고추도 좀 썰어 넣는다. 후추도 좀 뿌리고. 마늘은 넣지 않는다. 어묵을 넣고, 2분간 더 끓이고, 파와 가쓰오부시를 위에 뿌려 먹는다. 청주는 뚜껑을 덮은 유리병에 넣어 전자렌지에 1분 정도 돌린다. 히트텍 하나 사들고 왔는데, 이런 호사를 누린다고, 두연은 싱글벙글이다. '이런 날씨에 딱이네'라며 한 잔만 하자던 청주를 두 잔, 세 잔 들이킨다. 나도 마찬가지.
처음에 국물을 넉넉히 한 이유는, 나중에 우동을 말아 먹기 위해서였다. 우동면도 넣고, 떡꾹떡도 같이 넣어 한번 더 끓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국물도 잘 베고 먹기 좋게 익은 무로 입가심을 하면, 그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익은 무 같은 것은 어른들만이 아는 맛이다. 그리고, 속에 난 땀을 식히기 위해 마당으로 나가 담배를 나눠 핀다.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떠있고, 월광이 눈부시다. 둥근 달과 동그란 어묵과, 동그란 청주잔이 하나로 겹쳐지면서, 충만감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