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뉴요커

음악 일기 / 뉴욕 / 2014.8. 27 망원

by 전찬준

떠오르는 사람이 많은 아침이다. 보통 뉴욕에서 찍은(2009) 사진들을 보며 글을 쓰지만, 사진에 없어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 기억들이 더 많다. 어제의 밀린 설거지는 남겨두고, 아침으로 사과부터 베어 문다.

아침 메뉴는 보통 비슷했다. 토스트, 계란 프라이, 양상추 샐러드(가끔 슬라이스 한 토마토), 사과였다. 뉴요커의 로망인 크림치즈 베이글과 블랙커피를 한동안 먹기도 했지만, 이내 질려 버렸다. 정확한 종은 모르겠지만, 미국사과(?)는 한국사과보다 훨씬 작고 붉고 퍼석했다. 그리고 손으로 조금만 훔쳐도 광이 나는 껍질을 가지고 있었다.


마트에서 7개 정도가 들어있는 봉지 사과를 사서 매일 하나씩 꺼내 먹었다. 집에서 나가면서 손에 들고 지하철까지 걸어가면서 먹었다. 사과 꽁지는 인도 군데군데 있는 큼지막한 철제 쓰레기통(마피아들이 관리하는)에 기분 좋게 던져 넣었다. 아삭거리는 소리는 하루를 상쾌한 느낌으로 시작하게 해 주었다.

뉴욕에서 장을 보는 일은 꽤 즐겁다. 일단, 외국인의 입장에서 생전 한 번도 못 먹어본 과자와 음료들이 많다. 그리고 식료품들의 가격이 대체로 저렴하다. 뉴욕 생활에 좀 적응하고 나서, 나는 거의 매일 점심을 소고기 뭇국 아니면, 삼계탕으로 먹었다.


일단, 뚝배기 하나를 장만했고, 다진 마늘, 채 썬 무, 파, 소고기 혹은 닭을 넣고 적당히 삶아, 나중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 밥을 말아먹었다. 내가 지내던 우드사이드의 셋방은 대만 사람이 주인이었는데, 공용 부엌 전기밥솥에는 언제나 밥이 있었다. 비록, 날아가는 쌀이었지만.


깍두기나 김치는 집 근처 '한아름'이라는 한인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내가 점심메뉴로 위와 같은 것들을 선택한 이유는 물론, 조리법이 간단해서였고, 가장 큰 이유는 질 좋은 고기를 저렴한 값에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식사를 할 경우에는 맥도널드가 아니고서는 팁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고, 나도 팁을 받고 일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박하게 팁을 줄 수도 없었다.


바텐더로 일하면서 몇몇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바텐더로 어떻게 일하게 되었는지는, 따로 또 써야겠지만.


재희는 제주도 사람이었다. ‘제주도 여자가 앉은자리에는 풀도 안 난다’는 말을 그때는 몰랐고, 2016년에 내가 제주도에 터를 잡고 살게 될지는 더더욱 몰랐다. 아무튼, 그녀는 내가 여태껏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작은 키에 평상시에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지만, 클럽에서 안경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춤을 출 때면, 남자들이 줄을 섰다. 나는 처음에는 쌀쌀맞고 깐깐해 보이는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웨이터들도 나와 마찬가지인 눈치였고.


재희는 주방과 홀의 경계를 허물며, 손이 바쁠 때는 요리도 하고, 설거지도 했으며, 캐셔도 보고, 심지어 바텐더까지 했다. 사람이 어떤 곳에서 오래 일을 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 일의 경계를 스스로 만들고, 누군가 그 영역 밖의 일을 조금이라도 시키면, 일단 거부반응부터 보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관념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사장은 그녀를 엄청 좋아했다.

누나(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는 잠은 보통 세 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고, 새벽 2시쯤 식당일이 끝나면, 다음날 아침 일찍 칼리지에 나가 수업을 들었다. 늘 좋은 성적을 받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쉬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마음으로 존경하기 시작했고, 그녀도 나의 음악적 행보들을 응원해 줬다.


재희는 유학생들의 로망인 아스토리아에 살고 있었다. 나는 1주일에 한 번씩 기타를 가르쳐 주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화장실, 부엌을 공용으로 쓰는 지하 원룸에 살고 있던 나에게 재희의 집은 거의 궁궐 수준이었다. 작지만 거실도 있었고, 자그마한 화장실에 방 두 개(방 하나는 룸메이트가 산다), 소파까지 있었다. 시간당 10불에 기타를 가르치며, 다시 한번 그 근성과 리듬감에 감탄하며, 그녀의 집을 나서곤 했다.


가끔 페이스북으로 재희의 소식을 보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도 해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아마, 내가 아는 진정한 뉴요커 한 사람을 뽑는다면, 단연 재희누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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