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당 모의

음악 일기 / 뉴욕 / 2014.8.28

by 전찬준

신선생님은 잊을 만하면, 이른 아침에 카톡으로 차 사진을 보내며,

"전선생, 차 한잔 하세요."라고 하신다. 내일은 커피 상점 이심에서 선생님과 커피를 한 잔 하기로 했다.


east village를 배회하다, 건물 벽에 아무렇게나 쓰인 글귀에 눈이 간다.

'How you gonna Change the world if you can`t change your self?'


가끔씩 눈에 띄는 갤러리들 앞을 서성였지만, 들어가 보진 못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건물 벽의 그라피티들이 눈에 들어온다. 팩맨이 선글라스를 끼고, 혓바닥을 내밀며, 나를 조롱하고 있다.


걷다 보니, 소호까지 왔다. 걷기 좋은 날씨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 한 잔 하기 좋은 날씨다. 빨간 격자무늬 테이블보가 깔린 야외테이블이 놓인 카페를 지난다. 그 앞에는 군데군데 빛바랜 노란색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 둘이 테라스에서 햇볕을 쬐며, 뭔가 즐거운 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맞은편에서 술에 취한 노인이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으며, 다 헤진 가죽점퍼를 입은 예술가는 인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 맨해튼은 신기한 도시다. 늘, 어디선가 작당 모의를 하는 것 같다. 내 관찰자적 성향이 이 도시에서는 극대화된다.

날이 어둑해진다. 우연히 지나는 골목 한 귀퉁이가 사람의 무리들로 시끌벅적하다. 사람들은 손에 음료가 담긴 빨간색 플라스틱 컵을 하나씩 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음악소리도 들린다. 파티 중이다. 아무것도 없는 골목 귀퉁이, 건물은 헐린 채, 흙이 아무렇게나 파헤쳐져 있는 공터에서 사람들은 이미 흥건히 술에, 음악에 취해있다. 흙구덩이 한 곳에는 스테인리스로 만든 목 없는 사람 셋이 벽에 달린 파이프에 밧줄을 걸고, 열심히 무언가를 당기는 모습을 형상화한 구조물이 있다. 설치 미술작품일 테고, 아마 전시 오프닝 중이었나 보다.


나도 그 무리에 끼어, 관계자가 건넨 플라스틱 컵에 담긴 정체불명의 음료를 마신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용기는 없었다. 배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강목을 척추 삼아, 철사를 여러 번 꼬아 만든 개 작품을 뒤로하고, 소용돌이 속을 빠져나온다.


현관에 '803호'라고 쓰여 있는 건물을 지난다. 1층인데... 첫 자작곡 '라라'를 녹음했던 장소도 803 스튜디오였다. 잠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지친 밤, 지친 다리도 쉴 겸, 눈앞에 당장 보이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당근 주스를 주문했다. 왜 당근 주스를 시켰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적어도 당근 주스를 시킬 정도의 돈이 주머니에 있었으리라. 주변의 눈치를 보며, 기타를 작게 치면서, 무언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안경을 끼고, 손에 뜨개실을 든 중년의 흑인 여자가 다가오더니,


'very good music, boy, good luck'이라 말하고 다시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간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소호의 한 카페였다. 어떤 음악가가 맨해튼을, 뉴욕을 싫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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