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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준 Mar 06. 2024

멘토

음악 일기 / 뉴욕 / 2014.10.5 망원

아무튼 젊은 나의 이런 기록들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벽을 견고히 쌓는 일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작업이 되었으면 한다. 음악가로서 다양한 음악을 듣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아이돌 그룹에 빠져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거의 내 돈 주고, 음악가의 앨범을 사서 들은 적이 없다.


대학교 때, 윤원이 형을 만나면서, 음악적 편협함을 조금이나마 없앨 수 있었다. 형은 수십 장의 각종 장르의 CD를 손수 구워주며, 들어보라고 했다. 형들이 시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잘하는 나였으니까, 형이 준 시디를 아이리버 mp3(그때는 기계이름 자체가 mp3였다)에 다 집어넣고, 이어폰을 항상 귀에 꽂고 다녔다. 그것들은 대부분 80,90년대 롹이었으며, 지금까지 내 감성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데이브 매튜스를, 그리고 잭 존슨을 소개해 준 것도 형이었다. 시간이 지나 형은 애아빠가 되었고, 요즘은 기타 만질 시간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운 좋게도 내 삶에는 음악적 멘토가 시기별로 등장한다, 선택이형이 그랬으며, 신선생님과 성용이 형이 그랬다. 여전히 이렇다 할 오디오나 컴퓨터 스피커조차 없는 나에게 꾸준히 음악을 소개해주고, 신선생님은 거의 매일 카톡으로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다양한 유튜브 링크를 보내오신다. 나는 그것들을 꼭 보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는 동숭동에 강준혁선생님 49제 추모 음악회에 신선생님의 초대로 다녀왔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클래식 공연이 이어졌으며, 사람들은 곳곳에서 눈물을 훔쳤다. 현악 4중주가 유일하게 귀에 들어왔으며, 나머지 곡들은 노력해야 들을 수 있었다. 음악회가 끝나고 다과회가 이어졌다. 와인과 간단한 퓨전 음식들을 일회용 용기에 담아 먹는 형식이었다. 이런 류의 다과회는 어디서 온 걸까? 

그 형식이야 어쨌든 생전의 강 선생 님이 사람들 밥은 꼭 먹이라고 하셨단다.


뒤에 앉은 여자들은 음식을 먹으며, 

'이 집은 항상 고급 음식을 해', 

'재료들이 꽤 비쌀 텐데', 

'돈은 어디서 났을까', 

'우리 아들은 110kg라 군 면제가 안돼' 등의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점점 자리가 불편해졌다,

선생님께 가봐야겠다는 인사를 드리자,

"전선생, 오늘 내가 전선생을 부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이 광경이 보여주고 싶어서였어."라며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선생님은 자리를 좀 더 지키신다 했고, 사모님과 나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일석기념관을 나왔다. 

사모님은 

"찬준 씨, 명덕 씨는 설명을 잘 못하는 게 문제예요."라고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그래도, 강 선생 님이 명덕 씨한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어요. 여기 온 예술가들의 대부분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 테고..."

대학로의 한 신호등 앞에서 나는 사모님의 공손한 인사를 받으며, 사모님과 헤어졌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뜨거운 마음으로 들른 카페 사흘에서 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레너드 코헨의 음악과 만났다. 맹물형은 여전히 밴드그릇 2집 노래 중에서 떡볶이와 커피가 제일 좋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성대 앞 HOT 떡볶이 가게에서 떡볶이와 부산어묵을 먹었다. 대학교 이후로 처음이었고, 여전히 가게가 잘 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애띈 토니 안과 화장 짙은 강타의 얼굴을 보며, 떡볶이를 먹었다. 건너편 길에서는 갓 취직한 것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여자가 술에 취해 도로로 널브러졌고, 그보다는 덜 취한 친구들은 여자를 일으키느라 바빴다.


내가 bitter end에서 공연을 한다고 하자, 단골손님 길버트는 놀랐다. 길버트는 NYU 음악 대학의 노교수였으며, 가끔 식당에 혼자 와서 먹을 정도로 한국 음식을 즐겼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각자의 신변을 알게 되었고, 나는 bitter end의 공연에 길버트를 초대했다. 길버트는 다음날 공연에 캠을 들고 와 영상을 찍어줬고, in my side를 내 노래가 맞냐고 재차 물었고, 라디오 헤드의 'no surprise'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다고 했다. 길버트는 다음날 자신의 블로그에 in my side의 끝구절을 인용해 내 공연에 대해 썼고, 히스토리컬 이벤트라고 했다. 하긴 우리가 사는 동안 일어나는 일들 중에 히스토리컬 이벤트가 아닌 일이 있을까?

 

그렇게 길버트는 뉴욕에 있는 동안 틈만 나면, 나에게 음악에 관한 조언을 해주었으며, 내가 한국에 간다고 하자, 부모님의 메일 주소를 물으며, 자기가 부모님을 설득해 보겠다는 농담을 던졌다. 물론, 나는 단지 부모님 얼굴만 뵈러 한국에 갈 생각이었다. 내가 그 이후, 쭉 한국에 머물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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