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력 향상기인가, 최첨단 수면 유도기인가?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3월, 새 학기가 시작됩니다. 새 책, 새 공책, 그리고 "이번 학기엔 진짜 공부한다"는 지키지 못할 다짐들이 난무하는 시기죠. 90년대 대한민국 수험생들의 책상 위에는 이맘때쯤 어김없이 등장하던 성적 향상을 위한 욕망의 결정체가 있었습니다. 바로 '엠씨스퀘어(MC Square)'입니다.
친구 원보네 부모님은 자식 교육에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이 보고 싶다고만 하면 웅진출판사에서 나온 60권짜리 한국·세계 위인 전집을 통째로 들여놓으실 정도였죠. 덕분에 저는 원보네 놀러 갈 때마다 그 귀한 책들을 쏠쏠하게 빌려 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보의 책상 위에 정체불명의 기계가 놓여 있었습니다. 미니 카세트 마이마이 사이즈의 본체에 선글라스, 그리고 이어폰. 신문 전면 광고에서 '전교 1등의 비법' 또는 '명문대 수석 입학' 을 했다며 이라며 자랑스레 웃고 있던 그 형의 얼굴과 함께 등장했던 전설의 명기, 엠씨스퀘어였습니다.
당시 아빠 월급이 100만원이 안 되었고 롯데리아 1시간 시급이 1500원이 안 되던 시절에 30만 원을 훌쩍 넘던, 지금으로 치면 최신 아이패드 프로 이상의 위상을 가진 초고가 장비였습니다. 부모님들은 "이거 쓰면 서울대 간다더라"는 절박한 믿음으로 쌈짓돈을 털어 이 비싼 기계를 사주셨죠.
저는 원보에게 "나도 한 번만 들어보자"고 부탁했고 못 이기는 척 그 사이버틱한 고글을 넘겨받았습니다. 그걸 착용하는 순간, 평범한 학생은 영화 <매트릭스>에 나올 법한 '사이버 전사'로 변신했습니다. 어쩐지 이제 나도 전교 1등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기계의 전원을 켜면 특유의 전자음이 귓가를 때립니다. "뚜... 뚜... 뚜..." 그리고 눈앞의 빨간 고글에서는 LED 불빛이 번쩍거립니다. 설명서에는 이것이 뇌파를 '알파파'로 자극해 집중력을 극대화한다고 쓰여 있었죠.
그런데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불빛이 번쩍거리는 이 선글라스를 끼면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보는 집중력을 높이겠다며 비장하게 엠씨스퀘어를 꼈습니다. 하지만 앞이 안 보이니 정작 책을 펴놓고 읽을 수는 없고, 그저 30분에서 한 시간가량 의자에 기대어 멍하니 기계음만 듣고 있어야 했죠. 그러다 결국 뇌파가 너무 안정된 나머지 "아우 졸려" 하며 그대로 잠들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저는 쿨쿨 잠든 원보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기... 그럼 공부는 대체 언제 하는 거니?'
솔직해집시다. 엠씨스퀘어 쓰고 끝까지 공부한 기억보다, 침 흘리고 잔 기억이 더 많지 않으십니까? 그 규칙적인 "뚜-뚜-" 소리는 집중력(알파파)이 아니라 완벽한 수면(델타파)을 유도하는 최고급 자장가였습니다.
독서실 칸막이 안, 빨간 안경을 쓰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입을 벌리고 자던 친구들의 모습. 심지어 자면서 고개가 떨어져 "쿵!" 하고 책상에 박는 소리에 깨어나, 황급히 침을 닦고 다시 공부하는 척하던 그 시절의 풍경들. 어쩌면 엠씨스퀘어의 진짜 기능은 집중력 향상이 아니라, 매일 밤낮으로 지친 수험생들의 뇌를 강제로 쉬게 만드는 '단잠 보장 기기'였는지도 모릅니다.
기계에는 P1(집중), P2(휴식), P3(숙면) 등 다양한 모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차이는 미미했습니다. P1을 틀어도 졸리고, P2를 틀어도 졸리고, P3를 틀면 기절했습니다. 결국 모든 모드의 종착역은 '숙면'이었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 앱으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ASMR의 초기 버전인가)들이지만 그때는 그 기계가 왜 그리 간절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뇌파를 조종하는 기계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조금 쉬어도 괜찮아", "너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라고 뇌를 토닥여주는 응원의 소리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요.
그 시절 30만 원짜리 빨간 안경 뒤에서 깜빡이는 불빛과 싸우며 밤을 지새웠던, 혹은 꿀잠에 빠져들었던 모든 수험생과 자식이 좋은 고등학교, 대학교 갈 수 있을 거라는 굳은 믿음으로 그 비싼 기기를 사주신 부모님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1. 혹하게 했던 광고
90년대 당시 고가의 학습 아이템이었기에신문 지면을 통해 실제 성적이 오른 학생들의 사례를 상세히 전달하는 증언식(Testimonial) 마케팅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명문대 합격생이 사용했다는 점을 내세워 집중력 향상 및 학습 효과를 강조하며 TV 광고와 함께 신문 광고를 통해 폭발적인 인지도를 얻었습니다.
2. 자연의 소리 (ASMR의 조상님)
기계음이 지겨울 때 듣던 '파도 소리', '빗소리', '새소리'. 지금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백색소음(ASMR)'의 원조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뇌를 맑게 해준다고 굳게 믿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마음을 편안하게 재워주는(?) 백색수면제였던 것 같고, 무엇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기기만으로는 성적이 오를 수가 없습니다.
3. 플라시보 효과 (Placebo Effect)
과연 효과는 있었을까요? 글쎄요. 하지만 적어도 심리적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나는 이 비싼 기계를 쓰고 있으니, 남들보다 더 효율적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그 기기를 가진 학생들은 그 기기보다 부모님의 관심과 응원이 더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요?
※ 이미지 출처
① TV 광고 이미지 https://www.youtube.com/watch?v=bTPAkHih7X8
② 신문 광고 https://blog.naver.com/msp3441/222835626327
③ 응답하라1994 이미지 https://m.blog.naver.com/hlkim96/2207654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