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군을 조준한 남자

면죄부 뒤에 숨지 말고 '아니오'를 외칠 용기에 대하여

by 최종병기

2026년 3월 16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8년 전인 1968년 3월 16일, 베트남의 작은 마을 미라이(My Lai)에서는 인류 역사에 남을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미군 보병들이 '베트콩 소탕'이라는 명령 아래, 무고한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1. "그냥 시켜서 한 일인데요?"라는 비겁한 방패


회사의 엄숙한 미팅 시간, 대표님의 지시 사항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당히 비겁한 저는 보통 책상 위 빈 노트에 맺힌 볼펜 똥을 닦아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속으로는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모기 날개 소리보다 작은 "네, 알겠습니다"뿐입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든든한 면죄부가 제 손에 들려있다고 믿으면서 말이죠.


1968년 3월 16일, 베트남의 미라이 마을에서 그 하루 동안 희생된 이들은 약 300명에서 500명 사이. 놀라운 건 그들 대부분이 총을 든 군인이 아니라 노인과 여성, 그리고 채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와 아기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광기에 휩싸인 시스템 안에서 '명령'은 칼날이 되어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미라이 학살 위령비

해당 사건의 이미지는 너무나 참혹해서 붙일 마땅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보며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말했습니다. 거창한 악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스템의 부품으로 살아가는 평범함'이 곧 악이 될 수 있다는 뜻이죠.


"난 군인이니까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던 그날의 병사들처럼, 우리도 "난 직장인이니까 상사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며 매일 작은 진실들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 아군에게 총구를 겨눈 가장 위대한 '이단아'


그 지옥 같은 학살의 현장 상공에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헬기 조종사 휴 톰슨 주니어(Hugh Thompson Jr.)입니다. 정찰 중 아이들의 시신이 즐비한 참상을 목격한 25살의 청년 톰슨은 본능적으로 헬기를 하강시켰습니다. 그리고 민간인들이 숨어있는 벙커와 그들을 쫓는 미군 보병들 '사이'에 헬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


그는 직접 헬기에서 내려 아군 보병 지휘관에게 항의했지만, 돌아온 건 "수류탄으로 끝내버리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다시 헬기에 올라탄 그는 기관총 사수들에게 인류 역사상 가장 무모하고도 처절한 명령을 내립니다. 벙커 안의 민간인을 대피시키는 동안, 만약 아군인 미군들이 그들을 공격하려 든다면 주저하지 말고 아군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너희에게 맡긴다! 저들이 저 사람들에게 총을 쏘면, 너희는 저들에게(미군에게) 쏴라! 알았나?"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대에서 아군을 사살해서라도 무고한 생명을 지키겠다는 이 결단은, 결국 광기 어린 학살을 멈추게 한 결정적인 브레이크가 되었습니다.




3. 우리에겐 부당한 명령을 멈출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사무실은 전장이 아니지만, 우리는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다수가 'Yes'라고 할 때, 혹은 침묵이 가장 안전한 전략일 때 고개를 들어 "이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휴 톰슨이 아군에게 총을 겨누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사실 '아니오'라고 말하는 순간, 잔잔한 미팅 자리의 평화는 깨지고 지독한 두통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네'라는 대답만 반복하며 시스템의 속도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고장 난 기계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럼 두 번까지만 참아요.


박명수 옹은 "참을 인(忍) 세 번이면 호구 된다"고 했지만, 진짜 호구는 '내 안의 목소리'를 참아내고 명령이라는 가속 페달만 밟는 순간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속품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의 의지로 방향을 결정하는 운전사여야 합니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남들이 닦아놓은 매끈한 명령의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가끔은 그 길을 멈춰 서서, 혹은 굳이 비효율적인 자갈밭으로 내려가서 "이 길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를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번 한 주, 회의실에서 혹은 모니터 앞에서 무거운 침묵이 흐를 때, 여러분 안의 작은 헬기 한 대를 띄워보시길 바랍니다. 비록 비틀거릴지언정, 그 발자국이 여러분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대체 불가능한 인간'으로 만들어줄 테니까요.


※ 참고 :

그날 미군은 민간인들을 사냥했다.https://www.ziksir.com/news/articleView.html?idxno=3091


※ 이미지 출처

① 악의 평범성: https://brunch.co.kr/@lucky7jk/555
② 미라이 학살 위령비: https://www.coffeeordie.com/forgotten-heroes-my-lai-massacre
③ 휴 톰슨과 헬기 크루: https://en.wikipedia.org/wiki/Hugh_Thompson_Jr.
④ 박명수 참을 인 세번 호구 : https://m.blog.naver.com/iamyfong/221170746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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