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날 면도기 생존법
2026년 3월 18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95년 전인 1931년 3월 18일, 미국의 발명가 제이콥 쉭(Jacob Schick)은 세계 최초로 전기면도기를 시장에 선보였습니다.
징징거리는 전기면도기를 턱에 문지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편리한 기계가 나온 지 한참 지났는데, 왜 우리 집 화장실 거울 앞에는 여전히 쉐이빙 폼과 날 면도기가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올해 2026년은 우리에게 친숙한 면도기 브랜드 '쉭(Schick)'이 창립된 지 정확히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질레트(Gillette)가 킹 C. 질레트라는 사람의 이름이듯, 쉭 역시 제이콥 쉭(Jacob Schick)이라는 발명가의 이름에서 따왔죠.
1. 쉭(Schick)의 100년, 그 기막힌 아이러니
1926년, 제이콥 쉭은 소총의 탄창에서 영감을 받아 날을 쉽게 교체할 수 있는 최초의 '매거진 반복 면도기(면도날을 교체하는 현대 면도기인 카트리지 면도기의 시초)' 회사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알래스카 군 복무 시절 얼어붙은 물로 얼굴을 베고 피를 흘리며 면도했던 트라우마가 있던 그는, 물과 거품 없이도 깎을 수 있는 기계에 집착했습니다. 결국 1931년 3월 18일, 세계 최초의 전기면도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죠.
쉭은 전기면도기의 성공을 너무 확신하여 카트리지 면도기는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하던 날 면도기 사업 지분을 모조리 팔아버리고 전기면도기에만 올인했습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결과는 어떨까요?
쉭의 전기면도기 사업 부문은 훗날 경쟁사인 1981년 필립스(Philips) 등에 매각되며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반면, 그가 버렸던 쉭의 '날 면도기' 사업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현재 전 세계 면도기 시장에서 질레트(약 50~60%)에 이어 약 15~20%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굳건한 글로벌 2위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기면도기를 발명한 사람의 이름이,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습식 날 면도기'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것이죠.
전기면도기가 날 면도기를 완벽하게 대체할 것이라 믿었던 쉭의 예상은 왜 빗나갔을까요?
한때 온 국민의 허리춤에서 울어대던 삐삐나 길거리의 공중전화는 휴대폰이 등장하면서 완벽하게 멸종했습니다. 필름 카메라는 디지털카메라에 잡아먹혔고, 그 디카마저 스마트폰 렌즈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들은 '빠르고 편리한 정보 전달과 기록'이라는 동일한 목적 하에, 압도적인 상위 호환 기술이 나오자 미련 없이 대체되어 버린 케이스입니다.
하지만 에어컨이 등장했다고 해서 선풍기가 사라졌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선풍기는 에어컨이 주지 못하는 '직접 피부에 닿는 자연스러운 바람의 감촉'과 환기라는 고유한 포지션이 있기에 훌륭하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전기면도기와 날 면도기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기면도기가 압도적인 '편리함과 속도'를 무기로 아침의 바쁜 시간을 지배했다면, 날 면도기는 따뜻한 물과 쉐이빙 폼이 주는 '개운함', 그리고 피부에 밀착해 수염의 뿌리까지 베어내는 '정교함'이라는 고유의 포지션을 지켜냈기 때문에 서로를 대체하지 않고 나란히 화장실 선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새로운 기술이나 압도적인 경쟁자가 나타났을 때 살아남는 법은, 상대방의 강점(편리함, 속도)을 이기려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줄 수 있는 고유한 감각과 포지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요즘 인공지능(AI)의 발전 속도를 보면, 마치 삐삐 시절에 스마트폰을 마주한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질 때가 있습니다. AI는 전기면도기처럼 상처 없이 빠르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해 냅니다. 만약 우리가 직장에서 'AI보다 더 빠르고 실수 없이 일하는 것'을 무기로 삼고 있다면, 우리는 스마트폰 앞의 삐삐처럼 완벽하게 대체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AI 시대에 살아남아 '공존'하기 위해서는 비록 속도는 조금 느리고 때론 상처가 날 수도 있지만, 동료의 마음을 세심하게 읽어내고, 복잡한 갈등을 피부를 맞대며 정교하게 조율해 내는 인간만의 따뜻한 감촉이 필요합니다. 효율성이라는 바람은 에어컨(AI)에게 맡기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식혀주는 부드러운 선풍기 바람은 결국 우리의 몫이어야 하니까요.
오늘 아침, 거울 앞에서 당신이 집어 든 것은 무엇입니까? 빠르고 편리한 전기면도기인가요, 아니면 정교하고 개운한 날 면도기인가요?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대체 불가능한 자신만의 쓸모를 증명해 내는, 면도날 같은 날카로운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 이미지 출처
① 초창기 쉬크 카트리지 면도기 https://www.ebay.com/itm/225961406935
② 전기 면도기 광고 https://www.outsourci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981
③ 제이콥 쉬크 :
https://thisdayintechhistory.com/03/18/the-first-practical-electric-razor/
④ 공중전화 : https://www.yna.co.kr/view/AKR2023060705790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