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용감했다.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비 오는 날 교실 난로가에서 시작된 괴담 이야기, 호기롭게 "오늘 밤 12시 정문 앞!"을 외쳤던 그날 밤, 이순신 장군님과의 만남은 과연 성사되었을까.
밤 11시 50분. 엄마빠가 깊이 잠든 틈을 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현관문을 빠져나왔다. 현관문 열고 닫히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은 가로등이 있긴 하나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평소엔 10분이면 닿는 등굣길이 그날따라 왜 그리 멀고 험하게 느껴지던지, 학교 가는 길의 윤희네 구멍가게, 제일 문방구는 모두 불이 꺼져 있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정문 앞 가로등 아래, 내 절친 원보가 서 있었다. 약간 통통한 체격이라 평소엔 듬직했던 녀석이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였다.
"야... 왔냐?"
"어. 가자. 별거 없네 뭐."
라고 임병수의 염소 목소리처럼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떨리는 팔짱을 꼭 끼고(사실상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서) 굳게 닫힌 정문 옆 울타리를 훌쩍 넘어 학교에 들어섰다. 낮에는 밥 먹듯이 친구들과 축구하고 벽에 기대어 말뚝박기를 하던 그 운동장이 아니었다. 밤이 되니 바람 소리만 '스스스' 들리는 사막처럼 느껴졌다. 학교 건물의 검은 유리창들이 마치 수백 개의 눈동자가 되어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닌자처럼 발소리를 죽이며 운동장 중간쯤까지 걸어 들어갔다. 목표는 아침 조회대 옆 '이순신 장군 동상'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독서상의 실루엣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창백해 보였다.
"야, 병기야. 저기 봐..." 원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저만치 학교 건물 모퉁이를 가리켰다.
"어? 뭐?"
그 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학교 건물 어느 교실의 창문에 희미하고 파르스름한 불빛 하나가 아른거렸다.
"이 시간에 교실에 아이들이 이...있을리가..."
운동장 한가운데에 둘이 서서 한 발자국도 못 떼고 있을 때, 중앙 현관 근처에서 작은 불빛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포에 절여진 내 눈에는 그게 '도깨비불' 혹은 '귀신의 눈알'로 보였다.
"헉!" 머리털이 쭈뼛 선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았다. 원보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원보의 겁에 잔뜩 질린 하얀 눈알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치게 했다.
"으아아악!! 귀신이다!!! 도망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으으으 하며(너무 놀라면 소리를 지를 수가 없더라.) 체감상 칼루이스 같은 속도로 뒤돌아 미친 듯이 뛰었다.
"악!" 본래 발이 느린 원보가 마음이 급했는지 자기 발에 걸려 철퍼덕 엎어졌다. 그리고 애원하듯 말했다.
"야! 같이 가! 나 버리지 마!"
녀석은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으허헝 하고 귀신처럼 흐느꼈다. 뒤돌아보자 원보는 누군가가 자기의 발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네 발로 운동장의 흙바닥을 허우적거렸다. 나도 마음이 급한데... 얼른 원보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우지는 못하고 옆에서 원보의 뒷덜미를 잡으며 빨리 일어나 뛰라고 재촉했다. 공포에 질린 원보는 일어났지만 넘어지면서 정강이를 다쳤는지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함께 학교 운동장 구석으로 내달렸다.
우리가 멈춰 선 곳은 정문 옆 구석이었다. 학교 밖으로 나가기 직전, 안전지대라 생각한 곳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긴장이 풀려서일까? 갑자기 아랫도리에서 참을 수 없는 생리 현상이 밀려왔다.
"야... 나 오줌 마려워..."
"나도... 쌀 것 같아... 실은 나 이미 조금..."
우리는 뒤돌아 학교 중앙 현관의 도깨비불(?)을 다시 체크하며 울타리를 근처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을 아래 나란히 섰다. 바지 지퍼를 내리고 고추를 꺼내 시원한 물줄기를 쏘았다. 두 물줄기에서 오줌 떨어지는 소리만 정적을 깨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춥고 무서워서 아직 다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빨리 빤쓰 안으로 고추를 넣고 서둘러 지퍼를 올렸다. 원보는 그 모양을 보고 대강 수습을 하는 모양새였는데 채 털지 못하고 바지 지퍼 부분이 젖었다.
바지를 추스린 원보는 갑자기 킥킥거렸다. (아니 왜 웃는 거야 무섭게...)
"야, 병기야. 현호 말이 맞다면 여기 바닥이 다 공동묘지잖아."
"그렇지?"
"그럼 지금 우리가 운동장 밑에 있는 귀신들은 짭짤하고 뜨끈하겠다."
"우리가 왔다갔다는 메세지지. 귀신도 짜증 무지하게 날 것 같은데."
우리는 서로를 보며 킬킬댔다.
비록 도망쳐 나왔지만, 마지막 자존심으로 귀신들에게 '영역 표시'를 한 셈이었다.
학교 담벼락을 넘어 가로등 밑으로 나오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이제 문제는 '내일'이었다. 전교 부회장 동진이와 친구들이 눈을 반짝이며 무용담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도깨비불(인지도 불확실하지만) 보고 네 발로 기어서 도망쳤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원보가 흙투성이가 된 무릎을 털며 나를 봤다. 내가 말했다.
"야... 우리 말 맞추자."
"어떻게?"
우리는 그 가로등 아래서 '거짓말 시나리오'를 짰다.
"일단 이순신 장군 동상은 봤다고 해. 칼이 스윽 움직이는 거 봤다고."
"그래, 그리고 이승복 어린이 동상! 입이 귀 밑까지 찢어져서 우리 보고 씨익 웃었다고 해."
"오, 좋다. 그리고 교실 뒤 거울은?"
"교실은 커녕 학교도 못 들어갔는데... 그냥 손거울 가지고 가서 운동장에서 봤다고 하자. 거울 속에... 미래의 내 신부가 보였다고 해."
"야, 그건 너무 갔다. 그냥 하얀 소복 입은 여자가 머리 빗고 있었다고 해. 무슨 샴푸를 쓰는지 머리결 엄청 좋았다고."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내일 학교에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남자들의 '비밀'이었다.
"근데 애들이 믿겠냐?"
"몰라, 우린 분명히 확인하고 온 거다? 오줌까지 싸고 왔으니까 영역 표시도 확실하다고."
우리는 꼬질꼬질한 손으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했다. 그날 밤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척하는) 어린이가 되었다. 내일 아침 자습시간에 아이들에게 자랑할 영웅담을 기대하며.
그날 밤 그동안 밍밍했던 물맛이 짭짤해져서 너무 좋다고 아우성치는 귀신의 꿈을 꾸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 왜 괴담이 많았을까?
1. 억압된 아이들의 '스트레스'와 '한(恨)'
학교는 아이들에게 '배움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통제의 공간'입니다. "뛰지 마라", "떠들지 마라", "공부해라", "성적이 그게 뭐냐". 하지 말라는 금기와 지켜야 할 규칙으로 가득 찬 감옥과도 같죠. 심리학적으로 볼 때, 아이들의 억눌린 스트레스와 공포(성적, 체벌, 따돌림)가 무의식 중에 '귀신'이나 '괴물'이라는 형태로 투영된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2. '낮'과 '밤'의 극단적 대비
낮에는 수백 명의 아이들이 뛰노는 시끌벅적한 공간입니다. 생기가 넘치죠. 하지만 밤이 되어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가면? 학교는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거대한 빈 공간이 됩니다. 늘 보던 익숙한 공간(교실, 복도)이 낯설게 느껴질 때 느끼는 공포,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이 극대화되는 장소가 바로 학교였던 셈이죠.
3. 일본의 잔재와 공간적 특성
당시 세워진 국민학교들은 일본의 잔재로 학교 건축 양식 자체가 획일적인 긴 복도식 구조였는데, 이런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복도는 공포심을 자극하기 딱 좋은 무대입니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가장 안전해야 할 곳'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화재, 체벌, 학교 폭력 등 아이들이 가장 무력하게 상처받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학교)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아이들의 무의식적 불안감이 괴담을 통해 표출된 것은 아닐까요? 아무리 평생 교육 시대이지만 설마 이미 죽은 귀신도 야자하러 온 것은 아니겠죠?
※ 이미지 출처
① 임병수 :
아이스크림 사랑 : https://blog.naver.com/lbh9257/221303606473
② 대낮의 학교, 불꺼진 학교 : AI 생성 이미지
③ 칼루이스 :
<올림픽> '육상 영웅' 칼 루이스 분노 가라앉힌 '서울의 추억'
https://www.yna.co.kr/view/AKR20160817015000007
④ 송전 초등학교 :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송전초등학교
⑤ 거울 괴담 이미지 :
[유머] 거울괴담) 밤12시에 칼을 입에 물고 거울을 보면...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49913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