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장례식 (2/4)

유품 정리, 서랍의 글씨

by 최종병기

1편 : https://brunch.co.kr/@killm3/79




처음 헤어지자고 말했던 날, 우리는 망원역 근처 카페에 있었다. 창이 큰 카페였다. 유리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멀쩡했고, 나도 멀쩡한 척했다. 나는 커피를 빨대로 빨았다. 쪼록, 하고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어색한 우리 사이의 정적을 깼다.


“우리 헤어지자.”


내가 말을 꺼냈고, 도현은 잠깐 눈을 깜빡였다. 처음 듣는 사람처럼,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람처럼. 그는 머쓱하게 “그럴까”라고 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만났는지는 그때 별 의미가 없었다. 오래 만났다는 사실은 ‘헤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아니라 ‘헤어질 때 더 조용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그날 밤 나는 친구들을 만났다. 합정역에서 내려 골목을 걸었다. 간판 불빛들이 어지럽게 깜박였고, 누군가는 내 어깨를 치며 “고생했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위로인지 축하인지 애매했다.


“도현이랑은 어때?”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묻는 순간, 내 속이 처음으로 쓰라렸다. 이별은 내 결심일 뿐이었는데, 주변이 이별을 화제로 만들었다. 내 4년은 내 선택으로 끝났는데, 남의 입으로는 “그럴 만하지”로 정리되는 거였다.


“헤어졌어.”


내가 말하자 친구들은 잠깐 멈칫했다가, 이내 또 다른 말들로 덮어버렸다.


“요즘 다 그렇지.”

“그래도 너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괜찮아 보이려고 나는 잔을 더 들었다. ‘괜찮다’는 말은 내게 자격증처럼 필요했다. 괜찮다고 말할 수 있어야, 내가 이별을 잘 해낸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술이라는 것이 자격증을 찢어버렸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연락처를 찾는 손이 익숙해서 더 무서웠다. 전화를 걸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습관이 나를 끌고 가는 것 같았다.


“하지 마.” 누군가 내 손을 눌렀다.

“왜?” 내가 웃었다. 웃는 얼굴로 울고 있었다.


나는 전화 대신 카톡을 열고 또 열었다. 대화방이 아니라, 도현의 프로필을. 친구 목록 검색창에 ‘도’를 치면 ‘도현’이 제일 먼저 뜨는 게 싫었다. 너무 쉽게 뜨는 게. 너무 쉽게 부를 수 있는 게.


그날 이후, 내 일상에는 유령이 살기 시작했다. 도현이라는 유령이 아니라, 도현을 부르는 내 습관이라는 유령. 그리고 그 유령이 나를 가장 세게 붙잡는 순간은, 이상하게도 “아플 때”였다.


며칠 뒤, 새벽에 배가 아팠다. 겨울이라 창문을 닫아두었는데도 방 안이 싸늘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부엌 서랍을 열었다. 그 서랍의 어느 칸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상비약 상자.


내가 산 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고른 상자가 아니었다. 도현이 어느 날 “이런 건 집에 꼭 있어야 돼”라며 남기고 간 상자였다. 뚜껑 위에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글씨를 보는 순간, 읽기도 전에 알 수 있는 글씨였다.


‘아플 땐 이거 먼저. 약은 식후에.’


단순한 문장인데, 그게 더 잔인하게 나를 침습했다. 이쁜 사랑의 문장보다 투박한 생활문장이 더 오래 남는다. 나는 포스트잇을 떼지 못한 채로 상자를 열었다. 약을 꺼내 들고도 한참을 서 있었다. 약 때문이 아니라, 이내 시야가 흐려지는 글씨 때문에.


그날 나는 깨달았다. 나는 도현을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도현이 해둔 ‘생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런 생활을 끊으려면, 나도 그 생활과 이별해야 한다는 걸.


<3편에서 계속>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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