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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퇴근 후 책 리뷰 모임에 다녀왔다.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대학원에서 수학 중인 대학원생이, 빅터 플랭클 박사가 유대인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극적으로 생존하게 된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죽음의 수용소' 에서 라는 제목의 책을 리뷰해 주는 모임인데,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꽤나 유명한 줄 아는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하기도 하고, 명문대 학생은 어떻게 강의를 하면서 노는지 구경해보고 싶어서 참여했다.
책을 전혀 읽지 않아도 한 시간 동안 본인이 요약해 온 리뷰만 잘 들어도 어디 가서 이 책 읽었다고 아는 척하게 만들어준다더니 과연 그랬다. 이 책은 이 모임을 통해서 이미 줄거리를 섭렵했으므로 앞으로 더 이상 읽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플랭클은 39살에 유대인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에 강제수용됐고 6개월이 지난 다음 해에 미군에 의해 가까스로 풀려났다. 그다음 해에 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책으로 써서 냈고 그 책의 제목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다.
수감자는 3단계의 심리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수용 직후에는 충격과 혐오를 , 수용 며칠 이후에는 정신적 죽음 단계인 무감각 상태를, 그리고 해방 후에는 해방감보다는 되려 비통과 환멸을 느낀다. 이 단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과 더불어 수감소 내에서의 생존전략 등을 이 책은 담고 있다.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에 집중하는, 빅터 플랭클의 로고테라피, 실존주의 상담기법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빅터 플랭클은 이후 92살까지 장수했다. 사실 책내용보다는 책리뷰 이후 모임원들과 논의해 볼 수 있도록 준비해 온 세 가지 질문이 인상적이었다.
1. 성선설 VS 성악설 :
나는 성선설을 믿는 쪽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착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을 평소에 자주 한다. 먹고살만한 부자들은 착하다. 본인들 먹고 즐기는 일에만 열중하기 바쁘지 굳이 남에게 나쁘게 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논리가 너무 빈약한가. 이런 내 의견을 듣고 '그 착함도 결국 먹고살만하다는 전제조건이 깔려야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인간은 악하다' 라는 의견을 듣고는 그대로 수긍해 버렸다.
2. 운명론 VS 자유론 :
나는 무조건 자유론이고, 세상 모든 일이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고 믿어왔다. 평소 '운명' 이라는 말에 편견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운명이라고 하면 어쩐지 사주나 무속신앙 따위가 떠오르고, 이런 쪽으로는 전혀 흥미가 없다. 하지만 이 모임을 통해 운명에 대한 생각을 조금 달리 해볼 수 있었다.
빅터 플랭클은 그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용소에 끌려가는 운명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내가 내 부모의 유전자를 가지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건 내가 선택하지 않은 피해 갈 수 없는 타고난 운명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였다. 운명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모든 운명은 결국 우연적으로 발생한 일들 아닌가. 운명이니 우연이니 하는 거 모두 말장난 같다.
3. 수동적 존재 VS 주체적 존재 :
인간은 타고난 유전자와 주어진 환경에 강한 지배를 받기 때문에 수동적 존재라는 입장이다. 누군가는 스스로 주제척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타고난 것들 속에서 딱 할 수 있는 것들만 선택하면서 살고 있을 뿐이다. 자유론을 거론하면서 정작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라고 언급하는 게 상당히 재밌다는 반응이었다. 심지어 같이 참여했던 모임원들 중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