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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의 소설 '구의 증명' 을 읽었다. 온라인 도서사이트 메인에 추천도서로 뜨길래 한번 읽어볼까 싶어서 대충 줄거리를 훑어보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를 먹겠다는 둥 어쩌겠다는 둥 하는 다소 괴이한 내용이라 처음에는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 안 읽으려고 했다.
그런데 한국 현대문학 스테디셀러에다가, 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달린 리뷰가 1,000개 가까이 되길래 소설을 읽는다면 이런 유명한 소설을 읽어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졌다. 마침 또 페이지수도 많지 않아서 가볍게 한번 읽어보기로 했다. 막상 읽기 시작하니 너무 흥미로워서 안 읽고 지나쳤으면 아쉬웠을 뻔했다. 몰입이 얼마나 잘 되는지 앉은자리에서 완독 했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감정이 북받쳐서 약간 울기까지 했다. 특히 담이 구를 먹을 때, 어차피 세상은 구에게 관심이 없었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었다고 독백하는 대목에서 울컥했다.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구(남)와 담(여)은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랐다. 구는 빚이 많은 가난한 부모님 손에, 담은 부모님 없이 이모 손에 자랐다. 둘은 늘 함께 했지만 10대 후반, 20대 초반 무렵에는 서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함께 하지 못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구는 돈이 필요했기에 고등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일찍이 공장에 취업해서 돈을 벌었고, 공장에 다니는 동안 그 공장에서 함께 근무하는 서른 살쯤 된 이혼녀가 혼자 사는 집에 드나들며 그녀와 애인 비슷한 관계가 되었다. 그러다가 이혼녀와 헤어지고 도망치듯 군입대를 하게 되고, 그 사이에 담의 이모가 죽어서 세상을 떠나고 담이 혼자 남겨지게 된다. 담은 고교졸업 후 돈이 없어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썰어 파는 일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구가 제대 후 담이를 찾아가게 되고 둘은 함께 살기 시작하지만, 알고 보니 구가 군대에 가있는 동안 구의 부모님이 구 앞으로 어마어마한 사채빛을 남겨두고 실종된 상황이었고, 구는 사채업자들의 빚독촉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구는 담에게 이별을 고하고, 담은 이모도 가족도 아무도 없고 자신에게는 구 하나뿐이라며 구와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한다.
구는 이삿짐, 공사장, 대리기사, 주차요원, 나이트 웨이트, 호스트 등 온갖 일을 다 하면서 버는 족족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갖다 줘도 평생을 이자만 지불하다가 생을 마감할 지경이었다. 사채업자들이 구를 배에 태워서 바다에 보내려고 하자 구는 담을 데리고 사채업자를 피해서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채업자들은 끝끝내 그들을 찾아냈고, 도망치던 중에 안타깝게도 구가 길 위에서 사고로 죽고 만다. 담은 죽은 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정성껏 목욕시킨 후 그를 먹기 시작하는데...
"구의 죽음을 아무도 몰라야 한다. 어차피 관심 없지 않았는가. 사람으로서 살아내려 할 때에는 물건 취급하지 않았는가. 그의 시간과 목숨에 값을 매기지 않았는가. 쉽게 쓰고 버리지 않았는가.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았는가. 없는 사람 취급받던 사람을,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
담은 구의 장례를 식인으로써 치렀다. 그를 이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다. 그를 먹음으로써 그와 하나가 되고 싶다. 하지만 이게 담이 구를 먹는 그러니까 식인을 하는 이유의 전부일까.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담이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저 상황이 되어도 나는 절대 구를 먹는 행위 따위를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 행위를 하게 되기까지의 그 감정이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살아생전 구가 담에게 식인과 관련된 스코틀랜드 전설을 들려줬었다. 과거에 소니빈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소니빈은 바다 절벽 아래 동굴에서 부인과 함께 살면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도, 실인, 식인을 저질렀다. 이유는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 그러는 동안 14명의 자식이 태어났고 그 자식들 또한 식인을 하며 무럭무럭 자라서 다시 또 22명의 자식을 낳았다. 서로 힘을 모아서 강도, 살인, 식인을 일삼으면서 함께 섹스도 하며 소니빈의 가족은 48명까지 늘어났다.
인원이 늘자 작업은 전문화되었고 분업이 시작됐으며, 그렇게 작업속도가 빨라지자 다 먹지 못하고 썩어서 버리는 인육이 넘쳐났다. 동굴에서 25년을 살다가 결국 온 가족이 다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살인에 가담하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일단 식인을 했다는 이유로 모두 사형당했다. 아무도 후회, 반성, 심지어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사람들이 자신들을 왜 혐오하고 비난하는지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식인은 현재의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사 먹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란 사람들이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고, 뭐든 죽이거나 먹을 수 있고,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며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거나 작살낼 수 있고, 구원할 수도 있다. 신을 믿고, 신을 이용하고, 수술과 약으로 죽음을 미룰 수 있고, 불을 이용해서 음식을 익혀먹을 수 있다.
식인을 하는 그들은 미개하고 야만적인가. 돈으로 목숨을 사고팔며 계급을 짓는 지금의 인간은 미개하고 야만적이지 않은가. 동물은 오로지 유전된 '힘' 으로만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는다. 인간은 힘 외에도 불과 도구와 돈으로 살아남는다. 인간에게는 돈도 유전된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들은 부모에게 유전받은 세상에서 속수무책이다. 전쟁통에서 총을 쏘고 총을 맞는 사람들 중 직접 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이란 뭘까. 나는 사람인가. 나는 사람이길 원하는가."
담은 구와 자신에게 너무 잔인했던 이 세상과 인간들에게 혐오를 느끼며 스스로 시람이기를 원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게 아닌가 생각된다. 담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대목에서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세상에 서로가 전부였던 두 남녀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이자, 인간이라는 존재의 개념(보편적 관념)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그리고 개념이란 그저 믿음일 뿐이고, 그 믿음이 반드시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도. 흔히들 긍정적인 의미로 표현되는 '인간적' 이라는 정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 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믿어라. 그러면 말이 된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가의 말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글을 쓰고 싶다 생각하고, 살아있으면서도 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버린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랑하고 쓴다는 것은 지금 내게 가장 좋은 것이다. 살다 보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것 따위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모른 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