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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순이 Nov 15. 2023

혼자 사는 사람들

콜센터 상담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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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사 콜센터 상담원 유진아는 실적 일등답게 일을 기계적으로 굉장히 잘 해내는 편이다. 일 하는 시간 외에는 늘 귀에 이어폰을 꽂고, 혼자 담배를 피우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사는 집에 오면 하루종일 티비를 틀어놓고 보다가 심지어 잘 때도 안 끄고 그냥 잔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고, 그냥 일 하고 먹고 티비 보고 자는 게 일상이다. 이런 유진아의 일상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 세 가지 사건이 있다.
 
첫 번째, 가족문제

외도로 이혼하고 집 나갔던 부친이 17년 만에 다시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지만, 1년 만에 어머니가 밤 중에 원인불명(일단 나는 이해를 못 함)으로 사망한다. 부친은 생전에 어머니와 최근까지 동거 상태이긴 했지만 오래전에 이미 합의 이혼 된 상태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재산은 친딸인 유진아에게 가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짧은 기간 동안 어머니의 전재산을 부친에게 상속하라는 유언장이 작성되어 있다.

물론 그 유언장 하나만으로 무조건 깔끔하게 부친에게로 재산이 상속되는 것은 아니고, 친딸인 유진아에게도 법적 권리가 있기 때문에 유언장과 관계없이 얼마든지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재산을 두고 부친과 유진아 사이에서 법정공방이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유진아는 그 재산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에 반해 부친은 변호사를 고용하고 유진아에게 재산포기각서에 서명을 하게 만드는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모든 재산을 자신이 가져가려고 하고, 유진아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각서에 서명을 한다.


(어머니가 굉장히 부자셨나 보다. 오래전부터 잘 살았을 것 같진 않고 늘그막에 재산을 좀 모은 것 같다. 그러니까 집 나간 전남편이 다시 돌아왔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집 거실에는 홈캠이 설치되어서 집안을 감시할 수 있다. 부친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어머니는 혼자서 그 집에 살았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신경이 쓰여서 만일의 경우를 위해 설치해 둔 것인데 부친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유진아는 재산포기각서에 서명하러 집에 간 날 부친 몰래 홈캠에서 메모리칩을 빼와서 지난 일 년간 그 집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보고, 그 이후로도 부친의 모습을 생방송으로 계속 감시하기 시작한다.

일단 살아생전 모친은 밤 중에 무슨 몽유병 환자 마냥 느릿느릿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걸어 들어갔고, 곧이어 부친이 소리를 지르고 당황해하며 거실로 뛰쳐나와서 아내가 갑자기 숨을 안 쉰다면서 119대 전화를 걸고, 머지않아 구급대가 도착해서 어머니를 실어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 이후로 부친이 슬퍼하는 모습은 잠시잠깐뿐, 그는 집으로 교회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식사도 하고 지나치게 즐거워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때때로 스포츠댄스 연습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외출을 한다. 유진아는 시시때때로 이런 부친을 모습을 화면 너머에서 지켜본다.

두 번째, 옆집 이웃의 사망과 새로운 이웃의 등장

유진아의 옆집에는 신원이 불명확한 남자가 혼자 살았는데, 그는 늘 복도에 나와서 담배를 폈다. 바로 옆집에 살고 복도에서 자주 마주치는데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나눠본 적은 없다. 어느 날 아침에 자고 일어났는데 건물 전체에서 썩는 냄새를 느낀 유진아는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서 그 사실을 얘기했고, 그날 저녁 옆집에 경찰이 와있는 걸 목격한다. 알고 보니 옆집 남자가 집에 잔뜩 쌓아놨던 포르노 잡지에 깔려 죽었고 그것이 무려 일주일이나 경과했다는 것이다. 유진아는 그날 아침에도 분명 그 남자를 복도에서 봤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곧이어 그것이 귀신이었음을 깨닫는다.

며칠 후 그 집으로 다른 남자가 이사를 온다. 그 남자는 계약 전 복도에서 우연히 유진아와 마주하고는 유진아에게 이 집이 엄청 싸게 나왔던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유진아는 그 집에 귀신이 나온다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웃겨서 웃음을 참지 못하던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기어이 그 집에 들어오고야 마는데, 사실 그 남자는 그 이후 그 집에서 있었던 일을 뉴스를 통해 다 알고 나서도 이사를 강행했고, 외롭게 죽은 혼을 기리겠다는 취지로 그 집에서 제사까지 지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은 현재 좋아하는 여자도 있고 곧 결혼도 할 거라서 신혼집으로 생각하고 이 집에 들어오는 건데 이 정도는 하고 들어와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며 옆집에 사는 유진아에게도 제사 초대장을 보낸다.

마지막 세 번째, 신입사원 교육

유진아는 회사에서 닷새간의 신입사원 교육을 맡게 된다. 기계적으로 늘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외에 거의 모든 일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진아는 이 일 역시 강력하게 거부하지만, 하기 싫으면 퇴사하라는 사수의 말에 결국 억지로 이 일을 맡게 된다. 하지만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닌 만큼 그 싫은 마음이 태도에서 뚝뚝 묻어 나온다. 자신과 잘 지내고 싶어서 살갑게 대하는 신입사원에게 그저 차갑고 무뚝뚝하게 대하는 유진아는, 신입사원과 같이 식사하기도 꺼려하고 점심시간에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대놓고 해버린다.

신입사원은 며칠 잘 버티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모욕적인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진상고객과의 통화를 끝으로 결국 그다음 날부터 연락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는다. 회사 측에서는 콜센터에서의 신입사원 잠수는 흔한 일상이기 때문에 또 못 버티고 그만두는 거겠거니 생각하고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화 한 통 정도는 해보라고 유진아의 사수가 유진아에게 권한다.
 

"너는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그나마 내가 같이 살았기에 망정이지, 너는 뭐 대단한 일 하는 것도 아니면서 혼자 밖에 나가 살면서 뭐 하는 거냐? 엄마 장례식 때도 내가 너보고 깜짝 놀랐잖아. 어떻게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냐? 너는 슬프지도 않냐?"

아무 미동도 없어 보이던 유진아의 감정이 부친의 언행으로 인해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는 게 느껴진다. 딸에게 죄책감 유발하기, 직업 하찮게 여기기, 그리고 정작 본인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하루종일 신나 죽으려고 하면서 적반하장이다. 딸이랑 좀 가깝게 지내면서 딸이 해주는 밥도 먹어보고 싶고 살갑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인데 쉽지 않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유진아는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잠수를 탄 이후 갑자기 잘만 해내던 일을 버벅대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그 길로 바로 회사 밖으로 뛰쳐나가서 부친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소리를 친다. 하지만 어딘가 시끄러운 곳에 있는 건지 통화가 잘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 일이 트리거가 된 것 같다.

옆집 남자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다. 계속 마음 쓰여하다가 새로 이사 온 남자가 제사를 지내는 날에 죽은 옆집 남자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서있는 걸 보게 된다. 유진아의 정확한 기분은 모르겠지만 내가 추측하기로 여기서 약간의 안도를 하는 느낌이다. 그동안 계속 신경 쓰였는데 다시 한번 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편히 가라. 대충 뭐 그런 느낌이랄까.

그 이후 잠수 탄 신입사원에게 전화를 건다. 그동안 마음 쓰던걸 하나씩 해결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회사에서는 늘 전화기를 잡고 일하는데 막상 이렇게 전화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냥 작별인사가 하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점심때 밥 같이 안 먹어줘서 미안하다. 사실 나도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한다. 혼자서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잔다. 그동안 제대로 못 챙겨줘서 정말 미안하다. 신입사원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흐느끼며 운다.

유진아는 그다음 날 회사에다 휴직계를 낸다. 뚜렷한 미래 계획은 없지만 변화를 위해 일단 쉬어가려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부친과 통화하며, 사실 집에 홈캠이 설치되어 있고 그것으로 그동안 집안을 관찰해 왔고 앞으로도 종종 지켜보겠다. 우리 사이는 딱 여기까지만 하자. 하고 하고 본인이 싶은 말만 하고 통화를 종료한다. 보는 내내 유진아에게 어찌나 감정이입하면서 봤는지 모르겠다. 결말도 깔끔하고 영화 잘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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