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순이 Oct 03. 2023

책리뷰 : 사브리나

평범한 사람들이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

공백포함 글자수 1,782 (3,081 byte)

공백제외 글자수 1,358 (2,657 byte)


'사브리나' 라는 제목의 그래픽 노블을 읽었다. 사브리나가 살해당한 후 남은 가족과 친구들이 겪어나가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자매인 사브리나(언니)와 산드라(동생)의 일상 대화로 시작되고, 사브리나가 혼자서 한적한 자전거길을 자전거 타고 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초반에 산드라가 사브리나에게 과거에 여행지의 호텔에서 겁탈당할 뻔했던 경험담을 들려주고 '숲 속으로 자전거 타고 가는 게 위험할까 봐 걱정하지마 짐승들은 호텔에 있으니까' 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자전거 여행을 권한다. 사브리나가 어디서 어떻게 납치되고 살해됐는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없지만 그저 이 대사와 마지막 장면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사브리나는 어느 날 갑자기 시카고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 사브리나를 납치 살해한 범인 티미 얀시는 살해장면을 녹화한 비디오를 각종 언론에 보내고 자살한다. 살해 이유는 그냥 관심병자라서. 살해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가 미국 전역에 퍼지고, 이 비디오를 둘러싸고 음모론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피해자의 실존여부까지도 의심받는다. 기어이 유가족의 신상이 털리고 각종 언론과 SNS와 이메일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고통받기 시작한다.

사브리나의 남자친구인 테디는 사브리나 실종 후 신경쇠약에 걸려서 친구인 켈빈로벨 집에 머물며 그의 도움을 받는다. 사브리나 살해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방 안에만 틀어박혀서 음모론을 떠드는 라디오 방송만 주구장창 들으며 점점 미쳐간다.

켈빈로벨은 직업군인이며 가족(부인 재키와 딸 씨씨)과 별거 중이다. 테디에게 자신의 집을 임시 거처로 제공하고 그를 돕는 선행을 베풀지만 피해자 남자친구와 연관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사브리나 유가족과 마찬가지로 신상이 털리고 음모론에 휩싸이며 고통받는 일이다.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테디가 다시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별거 중인 가족과 합치는 것이 무산된 켈빈로벨이 특별 수사대에 지원하게 되고, 그동안 혼자서 속앓이를 하던 산드라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받았던 메시지들을 공개하며 입장표명을 하는 등, 등장인물들의 일상에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기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뚜렷한 결말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끝부분에서 켈빈로벨에게 일어나는 일이 정확하게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아무튼 시작부터 끝까지 답답하고 불편하고 불친절한 책이다.

특유의 그림체 때문인지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도통 모르겠고 다들 말이 없을 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어서, 마지막까지 의심병을 놓지 못했다. 알고 보니 테디가 범인? 알고 보니 켈빈로벨이 범인? 이러면서. 이미 답은 나와있는데도. 사람들이 왜들 그렇게 음모론에 열광하고 타인의 비극을 소비하지 못해서 안달인지, 이미 나부터가 그걸 증명해내고 있는 꼴이었다.


피해자의 가족과 친구를 괴롭히는 저 익명의 사람들이 과연 나쁜 사람들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들일 것이다. 지금 당장 인터넷만 들어가 봐도 널리고 널려있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 그들은 그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자들이 보여주는 순진무구한 악마성을 익명을 이용해서 드러내고 있을 뿐, 뭐 인간 본성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나. 쓰레기 같아 보이는 일부 언론들도 사실은 서로의 욕구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 뿐일 테고.

평범한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이 뭘까. 그냥 무작정 버티는 거고, 절대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고, 어쨌든 안 죽고 계속 살아야 하니까 받아들이는 거지, 특별한 게 있을까 싶다. 진부한 말이지만 시간이 약이다. 그 약이 듣지 않으면 계속 고통을 안고 꾸역꾸역 살아 버티는 수밖에.

매거진의 이전글 책리뷰 : 레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