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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순이 Nov 15. 2023

글루미선데이

삼각관계, 다자연애, 폴리아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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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인공은 부다페스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유대인 '라즐로' 와 그의 연인 '일로나' 그리고 어느 날 레스토랑의 피아니스트로 고용된 '안드라스' 다. 어느 날 우연히 레스토랑에 방문한 독일인 사업가 '한스' 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안드라스가 라즐로의 레스토랑에 피아니스트 면접을 보러 온 날 안드라스와 일로나는 서로 첫눈에 반해 사랑하게 되고 그 사실을 라즐로에게 털어놓는데, 라즐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며 둘에게 삼각관계를 제안한다. 일로나 혼자 신난 표정이고 둘은 어쩐지 심각하다. 그렇게 셋의 관계는 시작된다. 아무래도 선택의 여지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좋아할 수가 있어. 육체를 위한 것과 마음을 위한 것. 나를 채워주는 것과 내가 갈망하는 것. 일로나가 그래 라즐로와 안드라스. 일로나를 완전히 잃느니 반이라도 갖겠어."

어느 날 우연히 레스토랑을 찾은 독일인 사업가 한스. 그 또한 일로나에게 반해 그녀에게 청혼하지만 거절당하고 홧김에 강물에 뛰어내린다. 그렇게 죽을 뻔한 그를 라즐로가 구하게 되고, 한스는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고 베를린행 기차를 타고 부다페스트를 떠난다.

안드라스의 자작곡 '글루미선데이' 가 비엔나에서 온 음반제작사 손님들의 마음에 들게 되어 음반발매까지 하며 많은 인기를 얻게 되지만, 노래를 듣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며 안드라스는 죄책감에 고통받는다.

그리고 한 여자를 두고 조금씩 고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두 남자. 안드라스는 레스토랑을 비우지 못하는 라즐로를 남겨두고 일로나와 둘이서 음반발매차 비엔나에 갔다 오게 되고, 며칠 동안 일로나와 떨어져 지낸 라즐로의 심기는 말할 수 없이 불편해져서 결국 셋이서 말싸움이 벌어지고 만다.

일로나는 이렇게 힘들어할 바에 차라리 셋 모두 헤어지자고 말하는데, 그때 마침 한스로부터 안부편지가 배달되고 거물의 레스토랑 예약 신청 전화가 걸려오는 등의 희소식이 들려오면서 기분이 좋아진 일로나는 헤어지지 말자고 말을 바꾼다. 고통과 시련을 전화위복 삼은 것인지 그것이 최선이라 여긴 것인지 그들의 사랑은 조금씩 안정되고 견고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부다페스트를 점령하고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는 와중에 라즐로의 레스토랑에 독일군 대령이 된 한스가 다시 방문한다. 처음에는 서로 반가워했지만 어쩐지 점점 태도가 달라지는 한스.

조금씩 위험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 전시상황 속에서 유대인인 라즐로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한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간 일로나를 보고 둘의 사이를 오해한 안드라스는 그녀에게 남자 둘로는 부족하냐고 헝가리 남자 둘보다 독일 남자 하나가 더 낫더냐며 화를 낸다. 그날밤 한스는 레스토랑에 찾아가서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하고 안드라스에게 글루미선데이를 연주할 것을 명령한다. 안드라스는 거부하지만 일로나가 연주하라고 부탁하자 연주 후 자살해 버린다.

처자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로나에게 끝까지 마음을 접지 못하는 한스는 처음에는 라즐로를 도와줄 것처럼 굴지만 기어이 라즐로를 수용소로 보내버리고, 안드라스를 잃은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라즐로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도움을 청하러 자신을 찾아온 일로나에게 몸을 주면 도와주겠다는 암묵적 신호를 보내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자 도와줄 것처럼 굴다가 결국 끝까지 배신해 버린다. 사랑하는 두 남자를 모두 잃은 일로나는 남은 생을 한스와 부부로 살아간다.
(살기 위한 선택이었겠지?)

한스는 80세 생일날 과거의 그 라즐로의 레스토랑에서 글루미선데이를 듣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알고 보니 일로나가 독살하는 것. 일로나의 복수는 왜 이리도 긴 시간이 걸린 걸까. 독살할 거면 조금 더 빨리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지만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고 오히려 어머니에게 축하를 건네는 걸 보니 한스가 아들에게 그리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고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라즐로 왈,


"이제야 글루미선데이의 메시지를 알 것 같아.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존엄을 가진다는 뜻인 것 같아. 상처를 받고 모욕을 당해도 한 줌의 존엄으로 우린 최대한 버틸 수 있어. 하지만 버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게 나아. 떠나는 게 나아 존엄을 지키면서."


안드라스는 그 존엄을 잃고 죽는 걸 택한 것이다. 라즐로도 끝까지 존엄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일로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존엄이 짓밟혔다. 그럼에도 끝까지 삶을 택한 이유는 지조가 없는 게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을 위해 싸울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겠지.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글루미선데이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울한 일요일
저녁이 찾아들고 있는 이 시간
나는 내 외로움을 어둠과 함께 나누고 있네
눈 감으면 떠오르는 수많은 당신의 추억
난 잠들지 못하고 당신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네
담배 연기 속에 그려보는 당신 모습
날 여기 길 잃은 천사처럼 홀로 두지 마요
나도 그대를 따라가리니

그토록 수많았던 고독한 일요일들
오늘 나는 긴 밤 속으로 먼 길을 떠나리
촛불은 타오르고 담배연기는 내 눈을 젖게 하네
사랑하는 벗들이여 눈물은 흘리지 말아 주오
이 마지막 숨결이 나를 영원히 고향으로 인도하리
그 어둠의 나라에서 완전한 안식을 누리리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듣고 자살을 해서 헝가리 정부에서 아예 이 곡을 금지하여 악보를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원본은 없고 있더라도 공개된 적이 없으니 진짜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고. 현재 남아있는 동일한 제목의 곡들은 전혀 다른 곡이거나 많은 부분 편곡된 곡들이고 그 편곡된 곡들도 애초에 원곡을 알 수 없으니까 실제로 편곡이 된 것이 맞는 건지 불명확하다고 한다.

정말 우울하다 우울해. 노래에 담긴 메시지가 너무 심하게 자살스럽다. 뭔가 오래전에 죽은 연인을 이제 나도 따라가겠다 하는 메시지가 느껴진다. 한때는 함께 일요일을 보내던 사람이 이제는 곁에 없으니 늘 혼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지쳐버린 고독한 자의 마지막 목소리 같다. 딱 들어도 죽으러 가는 사람의 유언장 같은 가사다. 죽음을 생각하고 있거나 정말 죽어야지 결심한 사람이 이 노래를 들으면 곧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을 것 같이 자극적이다.


노래에 진짜 뭔가 초자연적인 저주 같은 게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가뜩이나 전쟁 상황 속에서 너무 힘들고 우울한 시기였기 때문에 이런 우울한 노래가 충동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리고 자살한 작곡가도 애초에 그런 우울을 느끼고 있었으니 이런 노래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노래를 처음 안 건 이십 년 가까이 돼가는 것 같다마는, 오늘처럼 이렇게 구슬프게 들린 적이 없다. 영화도 여운이 많이 남아서 여러 번 봤는데 정신이 너덜너덜해지는 것 같다.


라즐로 어쩔 거야. 한 남자는 일자리 줬더니 연인 뺏어가고 또 한 남자는 목숨 건져줬더니 배신하고 되려 목숨을 앗아가고 이게 뭔 꼴이야. 마지막에 수용소로 끌려가는 기차 앞에서 한스와 마주쳤을 때 '그래 한스가 날 구하러 와줬구나' 하고 아주 짧게나마 희망을 가졌다가 순식간에 배신당했을 때의 그 심정, 얼마나 능욕적이고 또 허무했을까.

여기까지, 사람들을 자살로 이끄는 노래와 함께, 욕망과 전쟁으로 인해 서서히 망가져 가는 그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영화였다. 조금 더 덧붙여서, 이 영화의 또 다른 키워드는 폴리아모리 즉 다자연애다. 왜들 그렇게 임자 있는 여자를 원하나 모르겠다. 없는 사람은 계속 없고, 빈익빈 부익부가 연인관계에서도 나타나는 건가. 어쩌면 남의 여자를 빼앗는데서 오는 정복감 같은 건가. 아니면 그냥 순수하게 아름다움에 반해서? 아름다운 여자는 늘 애인이 있고 주위에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니까?

내 생각이지만 폴리아모리 즉 다자연애는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영화 속에서조차 굉장히 불안정하다. 내가 보기에 남자 둘은 위태롭고 여자 혼자만 신나 보이던데. 제 아무리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한다지만 셋이서 함께 잠자리할 정도로 변태적인 성향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 둘이 함께 하고 하나가 혼자되는 구도가 됐을 때 남은 하나가 느끼는 처참함이 참 절절하게 와닿았다.

나는 다자연애라는 것을 실제로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을 허다하게 많이 봤지만 말이다. 다자연애를 시도하려고 했던 사람을 알고 있는데 결국 파국을 맞았다고 전해 들었다. 가령 바람을 피우는 경우를 보면 한쪽으로 마음이 치우치기는 하나 다른 한쪽을 제대로 정리 못 해서 둘 다 만나거나 하는 식이고, 결국 두 사람 모두 제대로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아니면 그냥 몸만 원하거나. 그것도 뭐 사랑이라면 사랑이겠지만 사실 둘을 동시에 사랑하기에는 몸과 마음과 시간이 굉장히 부족하지 않으려나 싶다. 사람이 사랑만 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노동도 해야 하고 할 게 엄청 많을 텐데.

어쩌면 나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렇게 여러 가지 것들에 욕심이 나지. 두 가지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는 둥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은 당사자들도 다 아는 거지, 다 잃기는 싫으니까 반이라도 갖겠다는 거고 결국 욕망을 나눠갖는다는 거지 뭐.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삼각관계에는 뭔가 알 수 없는 당위성이 느껴진다. 그냥 마냥 슬프고 아름답고 현혹된다. 영화라서 그런 거겠지 뭐. 마지막으로, 일로나는 옷을 너무 잘 입는다. 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묘미가 바로 일로나의 스타일링을 감상하는 것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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