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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순이 Nov 07. 2023

장애에 관한 영화 세편

영화심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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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운


노산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해 준 영화다. 가임기라는 말이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구나 싶다. 확실히 나이가 들고 몸이 늙으면 정상적인 임신이 어렵고, 종번식의 욕구가 생명체의 너무나도 당연한 본능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아무래도 그 정상적인 임신이 불가능해진 상태니까, 감히 장애를 가진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노화도 사람이 장애를 가지게 되는 과정인가 싶기도 하고, 모든 인간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전제를 이 영화를 통해 확실하게 전달받았다.


임신 20주를 앞두고 양수검사를 통해 뱃속의 아이가 다운증후군이 거의 확정이라는 판정을 받은 상황이다. 본인에게 이런 상황이 닥치면 어떡할 거냐는 질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태를 하겠다고 했고, 나를 포함한 두 명은 낳겠다고 했다. 다들 아이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다고 했지만, 그냥 아이핑계를 대는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양육자가 힘들지 아이가 행복할지 안 할지는 낳아보기 전에는 아직 모를 일 같다. 물론 부모가 안 행복하면 자식도 행복하기 어렵기야 하겠지. 그런데 낙태도 쉽게 볼 문제가 아니다.


예전에 페미니즘 도서 중에서 낙태에 관한 그래픽노블을 본 적이 있는데 그림이 적나라하기도 했고 또 너무 심하게 이입을 했더니 계속 생각나서 며칠을 고생했다. 낙태의 고통이 낙태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전달됐기 때문이다. 사실 그 책을 읽으면서 저렇게 낙태를 하면서도 또 끊임없이 남자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신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주인공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몇 년 전 국가에서 여성들에게 무료로 지원해 주는 자궁경부암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에 방문했었다. 질에 딱딱한 막대기를 집어넣는 느낌이 너무나도 끔찍했고, 결국 참지 못하고 검사를 중단해야만 했고 몇 주 뒤에 억지로 다시 가서 재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차라리 그냥 성병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살아서 굳이 검사받을 일이 없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주인공의 행동이 더더욱 이해가 안 됐던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찬반보다는 오히려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말자' 혹은 '아이를 낳을게 아니라면 피임은 반드시 하자' 아니 피임을 할 필요도 없이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런 남자와는 애초에 그 짓을 하지를 말자' 라는 교훈을 얻었다.


이건 그냥 내 상상이고 추측일 뿐이지만, 평생에 걸쳐 고통받는 건 낙태를 하는 것이나 다운증후군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이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임신초기도 아니고 20주나 가까이 됐으면 그냥 팔다리 다 달리고 머리카락까지 나기 시작하는 아기 아닌가. 그러니까 나에게는, 한창 만들어지고 있는 뱃속의 아기를 난도질하고 분해해서 죽이는 것과, 완성 후 낳아서 죽이는 게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세간에는 종종 어린아이와 함께 동반자살하는 파렴치한 부모가 나타난다. 이게 부모입장에서나 동반자살이지 아이 입장에서는 명백한 살인이다. 사실 이게 한때 사회적으로 굉장히 이슈가 됐던 문제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식 죽인 부모를 욕하고 이해할 수 없어하지만, 이 위험한 세상에 아이 혼자 놔두고 죽고 싶지 않은 부모심정을 굳이 이해해 보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특히 여자아이 같은 경우 홀로 남겨졌을 때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나 같은 경우 초등학교 저학년 때, 부모가 있는데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빈집에 대한 공포가 심해서 집에 붙어있지를 못했고, 혼자서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울기 일쑤였다. 엄마가 죽어서 못 돌아오는 거면 어떡하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항상 그런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 당시 하던 일을 그만두고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되면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약간이나마 안정을 찾았던 것 같다. 이제는 가족으로부터 물리적,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가족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게 되고 굉장히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버렸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다.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나이에 보호자 없이 혼자 있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만약 부모가 내게 "난 널 보살필 능력이 안 돼, 힘들어서 죽고 싶은데 나 혼자 죽고 너만 이 세상에 혼자 두고 가는 게 너무 불안해, 그러니까 같이 죽자" 라고 말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이건 뭐 나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자기 의사 따위는 전혀 없는 본인 소유의 애완동물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부모고 나발이고 일단 도망쳐야겠다. 앞서 구구절절 늘어놓은 이야기의 요점은, 자식과 함께 죽는 부모의 그 뒤틀린 감정상태가 이해될 뿐이라는 거다.


다시 낙태 이야기로 돌아와서, 만약 낙태를 하게 된다면, 수술 중 자칫 잘못하면 내가 죽을 수도 있고 설령 살아남아도 후유증이 남을 것이다.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혹시나 낳아서 길렀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와 미련이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반대로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는 쪽으로 생각해 보자. 건강한 아이를 낳아 기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다운증후군 아이라니, 실제 수많은 사례를 들어보면 힘들 거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명하다. 하지만 적은 확률이지만 일말의 희망은 있다.


뱃속의 아이가 막상 낳고 나니 다운증후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그냥 학문적으로만 가능하니 재껴두고, 비록 장애가 있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정답이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후회해서는 안된다.


2. 정확한 제목이 기억 안 난다.


'약자' 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그래도 마땅한 단어가 없어서 쓰겠다. 약자 그러니까 약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착한 것은 아니라는 명제가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인가 보다. 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라고 봤을 때, 일단 이 영화에 나오는 장애인은 착하지 않다.


방문교사인지 뭔지 정확한 직업명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자의 언행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게 느껴졌다. 직업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하지 말아야 할 언행을 너무 많이 한다. 몸은 성인이지만 정신은 아직 아이인 정신 장애인이 방문교사에게 '선생님과 결혼하고 싶어요.' 라고 했을 때, 교사가 장애인에게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힘도 세야 하고 돈도 많아야 한다' 라고 답한다.


나는 저 방문교사가 굳이 밀폐된 방에서 단 둘이서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도 그렇고, 결혼에 대해서 꼭 저렇게 말했어야 했나 싶다. 내가 말을 너무 쉽게 하는가? 그럼 어떻게 말했어야 하는가? 어쨌든 나는 뭔가 전문적이지 못하다고 느껴졌다. 장애인은 자신의 힘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자신의 엄마를 칼로 찔러 죽인다.


성적욕구는 누구에게나 다 있지만, 영화와 같이 저렇게 장애가 있는 경우 사회화가 이뤄지지 않아서 그 성적욕구가 여과되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가 상당히 많다. 이제야 생각이 났는데 나도 과거에 정신장애인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 그런데 부모까지 죽이는 건 너무 극단적이다. 하긴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인간도 부모를 죽이기도 하니까 뭐. 대표적으로 돈과 원한?


3. 신혼여행


확실히 나는 평소 장애에 관심이 없었다. 지체장애의 정확한 개념을 몰라서 '몸만 불편하지 정신연령은 장애가 없는 사람과 똑같은 게 맞느냐' 라는 질문을 하고 답변을 얻어낸 후에야 소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도 부모가 신혼여행까지 따라와서는 첫날밤을 훼방 놓고 팬티와 콘돔을 챙겨주는 저 상황이 너무 치욕스럽다. 상자에 적힌 글자가 안 보여서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스토리 전개상 아마 맞을 것 같다.


마지막에 남자가 서럽게 우는데, 남의 일인데도 내 마음이 다 아팠다. 부모가 아들 정관수술을 시키려는 꼴이 마치 애완동물들 거세시키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자식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차라리 그냥 방관하고 고통에 빠뜨려버려라. 그 고통을 알아서 감내하면서 살게 내버려 둬라. 저렇게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역시나 너무 무책임하겠지. 이번에 본 영화 대부분이 정답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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