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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순이 Oct 18. 2023

스물한 살

인간관계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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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전문대학에 진학했다. 학업에 뜻이 없어서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접고 취업을 먼저 할까도 고민했지만 곧바로 사회에 나가는 것이 자신 없었다. 결국 몇 년간 시간을 벌기 위해 도피성 진학을 했다. 대학에 진학할 돈이 없었기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적당히 하향지원 했다. 애초에 공부를 잘 못 했으니 소위 말하는 커트라인 높은 좋은 대학은 꿈도 못 꿨다.


역시나 돈이 없었기 때문에 원서 접수에도 신중해야 했다. 원서비 20,000원을 써서 딱 한 군데 지원했고, 다행히 과수석으로 입학해서 한 학기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적성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국가고시에 응시할 수 있어서 전공 쪽으로 취업길이 정해져 있는 게 안정적으로 보였고,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업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문턱이 있는 질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설마 여기 오고 싶어서 온 사람은 없겠지. 다들 다른데 떨어지거나 성적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왔을 거라 생각된다. 사실 여기가 무슨 대학교냐. 그냥 취업공장일 뿐이지." 대학 입학 후 첫 수업으로 교양수업을 듣는데 교수에게 패잔병 취급을 당했다. 학생들을 모아놓고 한다는 첫마디가 고작 저런 말이었다. 하루는 단골 동네 슈퍼에 간식을 사러 갔다가 사장 아저씨가 내게 어느 대학에 진학했는지 묻기에 학교 이름을 알려줬더니 "이야 진짜 좋은 대학교 갔네, 잘 갔네, 잘 갔어." 라며 다소 과장된 축하를 해줬다. 자격지심이 발동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아저씨의 딸이 경북대학교에 진학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꼭 나를 비꼬는 말로 들렸다.


주변 평판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학교에 대한 애착은 당연하게도 없었고, 학교 생활 역시 재미가 없었다. 학기 초에는 학교와 집 만을 오가는 지루한 생활을 했다. 어쩌다 입학식날 앞뒤로 앉은걸 계기로 학기 초에 잠깐 어울리게 된 친구가 있었는데 몇 마디 나눠보니 이 친구의 성격이나 여러 가지 부분에서 호감을 느끼기가 어려워서 정이 안 갔지만, 특별한 의사를 밝히지 않고 내버려 두니 이 친구와의 불편한 관계가 계속 이어졌다.


이 친구를 향한 나의 정 없고 무뚝뚝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점심시간과 공강시간 등 수업이 없는 시간에 계속 나와 함께 있으려고 했다. 친구는 "내가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은 왜 하나같이 말이 없는지 모르겠다. 마음에 안 든다." 라는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나와 계속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이 없는데도 같이 있는 꼴이 우스웠다. 아무래도 혼자 있기는 싫고 나 외에 같이 어울릴만한 친구를 찾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학교 근처로 나를 만나러 온 고등학교 동창이 있었다. 수업 시간 외에 남는 시간이 많으니 동창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으나 친구가 계속 내 옆에 붙어 있으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동창에게 친구를 데리고 가도 되냐고 의사를 묻고 허락을 구한 후 친구를 데리고 약속장소로 가야만 했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말 한마디를 안 하고 뚱하게 앉아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동창은 별 생각이 없는지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겉보기에는 딱히 불편해 보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동창과 적당히 이야기 나누다가 수업시간 때문에 오래 못 앉아있고 일찍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뒤로 친구가 내게 말을 붙이지 않으며 화난 사람 같은 태도를 보이다가 잠시 후 혼자서 화가 풀렸는지 내게 다시 말을 붙여왔다. 친구는 아까 내가 자신을 챙기지 않고 동창과 둘이서만 대화를 나눠서 기분이 매우 나빴다고 했다.

 

오후 수업 때 필요한 과제를 집에 두고 온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바람에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잠깐 집에 다녀오려고 했다. 친구가 집에 가려던 나를 붙잡고 어디 가느냐고 기에, 과제를 두고 와서 집에 좀 갔다 오겠다고 말하니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혼자서 어떻게 밥을 먹느냐고 소리를 쳤다. 기어이 그 친구는 식사까지 거르고 도보로 30분이나 되는 내가 사는 집까지 따라왔다.


아무리 혼자 있는 게 싫어도 그렇지 이건 좀 과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슬슬 이 친구가 지겨워져 가던 찰나에 다행스럽게도 이 친구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그 새로운 친구와 셋이서 잠깐 어울리다가 내가 슬쩍 발을 빼니 자연스럽게 둘이서 어울리기 시작했다. 같이 다니지 않게 되자 자연스럽게 서로 인사조차 안 하는 사이가 됐다. 이 친구와 멀어지고 나니 점심시간과 공강시간을 혼자서 잘 활용할 수 있게 됐다.




그 당시에는 당장 현재에 즐거운 일은 전혀 없고 미래 걱정만 가득했다. 독서실에 앉아서 이것저것 공부를 시도하거나 미래를 구상했다. 내가 2년 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제대로 된 직장인이 될 수는 있을까. 벌써부터 자신이 없다. 일단 학교에 진학하긴 했는데 이제부터는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걸까.


국가고시야 뭐 다음 해에 준비한다 쳐도 지금 당장은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남들 다 하는 토익이니 뭐니 하는 건 이 쪽 취업이랑은 크게 관련이 없다고 교수조차도 말하니까 공부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공무원 시험 준비는 내 수준에 어림도 없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는 내가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던 것 같다. 살면서 한 번도 뭔가를 노력해서 얻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삶에 이정표가 있었으면 좋겠다. 시키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알아서 길이 착착 열렸으면 좋겠다. 그런 무력한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돈이 필요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초에 전공서적을 사는데 대략 20만 원의 돈이 필요했고 엄마에게 책값을 좀 줄 수 없냐고 하니 부친에게 달라고 말해보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 불편해하니 엄마가 대신 말해줬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그 돈을 내가 왜 줘야 하는데" 였다고 한다. 그 뒤로 결국 그 돈을 받긴 했지만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고, 당장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이 되어서 시도해 본 첫 번째 아르바이트는 해물탕집 서빙이다. 어버이날 대목 그 바쁜 날에 투입됐다가 고강도 노동에 시달린 후 하루만 일하고 잠수를 타버렸다. 고등학교 때 친구를 따라서 시내의 어느 장사 잘 되는 분식점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못 견디고 한 달 만에 그만둔 경험이 떠올랐다. 두 번째 아르바이트는 약국 전산입력 아르바이트다. 이 일은 다행히 도중에 관두지 않고 장기적으로 할 수 있었다. 다른 일에 비해서 그나마 몸이 편했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학교 다니는 내내 했으니 거의 2년 가까이했다.


하지만 내 딴에는 이 몸 편한 일조차 익숙해지기까지 굉장히 힘들었고, 서너 달 정도 일하고 진지하게 그만둘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일을 그만둘까 고민하던 시기에 엄마는 내게 "일 절대로 그만두지 마라. 고작 그런 일도 못 하면 앞으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다. 어차피 학교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될 건데 거기서 계속 일해라. 직원 시켜달라고 해라." 라는 말을 했다. 엄마는 집에서 돈을 갖다 쓰지 않고 알아서 척척 돈을 벌어 쓰는 내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나도 물론 내가 일을 하는 게 좋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그 일로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내 자존감을 지켜줬던 것 같다.


야간 진료를 하는 병원 앞에 위치한 대형약국이었고, 그러다 보니 밤늦게까지 문을 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학교 수업이 없는 평일 야간과 주말에 풀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교 수업이 없는 대부분의 시간은 일을 하거나,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집에 틀어박혀서 인터넷을 하거나 방송을 보거나 소설책을 읽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인터넷으로 하는 아이쇼핑에 열을 올렸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과제를 종종 했지만 양이 많지 않았다. 근무시간에 따라 적게는 20만 원에서 많게는 50만 원까지 벌었다. 50만 원까지는 좀 드물었다. 평일 낮 대타를 뛰어야 저 금액이 가능했다. 저축을 따로 할 수준은 못 됐고 대부분 폰요금과 점심값을 포함한 용돈으로 썼다.


휴학을 하지 않는 이상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방학 동안 바짝 풀타임으로 다른 일을 했어도 됐겠지만 그러려면 그나마 익숙해져서 할만해진 기존 일을 그만두고 또 새롭고 낯선 일을 구해야 했기 때문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적성에 맞지도 않고 첫 학기는 돈 안 들이고 공짜로 다닌 셈이니 지금 그만둬도 상관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퇴를 고민했지만, 고졸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망설여졌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업종이 기껏 해봐야 식당서빙 정도였다. 학자금대출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빚을 내서 학교를 마저 다녔다. 뒤늦게 장학금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런 것도 제대로 챙길 줄 모른다고 어리석다며, 엄마에게서 비난을 들어야 했다. 빚은 20대 후반에 모두 벌어서 갚았다.


정확한 시기가 기억나지 않는데 대략 2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같은 반 학생들과 같이 현장실습을 나가게 됐고 거기서 처음으로 한 친구와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 친구는 그동안 나와 친해지고 싶었는데 말을 걸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항상 수업이 끝나고 말을 걸려고 하면 내가 어딘가 가버리고 없다고 했다. 그 계기로 친구와 나는 친해지게 됐고, 그 당시 이 친구를 중심으로 함께 어울리는 무리도 생기게 됐다. 나는 아웃사이더가 잘 맞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성격이 잘 맞는' 동갑친구와 어울려 지내보니 생각보다 재밌었다. 친구는 학교 부근에서 자취를 했고, 친구의 자취방과 대학로 부근 카페에서 주로 놀았다.


슬슬 국가고시를 준비할 시기가 다가왔고 나는 드디어 몇 년간의 아르바이트 생활을 정리하고 국가고시 준비를 핑계로 반백수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2년제 전문대학의 마지막 학기, 즉 2학년 2학기 때는 학교에 거의 가지 않았던 것 같다. 뭔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학교에 가봤자 문제집을 푸는 게 대부분이었던 것 같고, 안 와도 출결에 영향이 없다고 했던가, 아무튼 뭔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한창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1Q84' 가 연달아 출간되던 시기라, 소설책에 푹 빠져있었다. 공부는 조금씩 했다. 친구는 졸업식 후에 자취방을 정리하고 친구의 아버지가 계신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그 당시 외할머니가 살아계셔서 엄마가 외갓집에 자주 왕래했고 내게 간간이 외가 소식을 들려줬다. 나보다 2살인가 3살 많은 외사촌 언니가 하필이면 나와 같은 전공으로 4년제 대학교에 진학해서 졸업 전에 조기취업을 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 언니와 몇 차례 비교를 당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국가고시를 준비 중인, 아직 졸업 전의 21살짜리 학생일 뿐인데, 남들 눈에는 그냥 남들 다 하는 취업도 못 한 백수였던 것 같다.


외할머니가 내 취업에 대해서 걱정하는 말을 엄마 앞에서 자주 했다고 했다. 심지어 외할머니가 그 집에 전화를 걸어서 우리 필순이 일할 데가 없으니 취업자리를 좀 알아봐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고 했다. 엄마가 그 이야기를 내 앞에서 잔뜩 신경질을 내면서 전달했다. 엄마가 외할머니 앞에서 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해서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일단 시험에 붙어야지 취업자리를 알아볼 것 아니냐는 게 내 입장이었는데, 사실 마음만 먹으면 그전에 어떻게든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 같긴 하다. 나는 구직활동에 굉장히 소극적이었다. 사실은 직장생활을 시작하기가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시험은 한 번에 합격했고, 나는 졸업을 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해서 국가가 공인하는 면허증을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내 선택이든 실수든 간에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전공을 살리지 못했으며, 엄마로부터 "실컷 자격증 따놓고 뭐 하냐. 돈과 시간이 아깝지도 않으냐. 2년간 인생을 허비했다." 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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