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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순이 Nov 30. 2023

치트키는 '만나는 사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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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쯤에 쓴 '정체불명의 모임 사람들'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언급한 내용이기는 하나, 최근에 이와 연결되는 새로운 에피소드가 생겨서 같은 내용을 또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더 이상 활동하지 않게 된 지 반년이 훌쩍 지난 모임의 모임장으로부터 몇 주 전에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왔다.


나와 같이 활동하던 모임원이 내게 호감이 있는걸 최근에 알게 됐고 그래서 두 사람을 밀어주고 싶다, 라는 게 연락의 취지였다. 그 모임원에게 내 연락처를 알려줘도 되냐는 질문에 나는 거절 의사를 밝혔고 모임장도 알겠다고 답장했다. 여기까지가 지난 글에서 쓴 내용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모임원으로부터 최근에 연락이 오고 말았다.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으려다가 궁금해서 받아봤더니 처음 듣는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내 이름을 언급하며 '필순님 번호 맞습니까' 라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그러더니 자신이 누구인지 알겠냐고 묻는다. 일단 내 이름도 알고 있고 나를 아는 사람이 분명한데, 가만 보자, 듣다 보니 이거 모임장 억양이랑 비슷한 것 같네, 모임장이구나, 싶어서 모임장 이름을 언급했더니 곧바로 '아뇨, 저 OOO입니다' 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 뒤로 이어지는 대화는 다음과 같다.


나 : 아, 안녕하세요.

상대 : 저 기억하세요?

나 : 네.

상대 :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나 : 네. 가능해요.

상대 : 요즘 잘 지내고 계세요?

나 : 네네.

상대 : 갑자기 모임 나가셔서 놀랐습니다.

나 : 아.

상대 : 요즘 뭐 다른 모임은 안 하시구요?

나 : 네. 이제 모임은 안 해요.

상대 : 그러면 그냥 회사 집 하면서 지내고 계시는 겁니까?

나 : 아 네네.

상대 : 혹시 뭐 아프고 그러신 건 아니시구요?

나 : 네 그렇진 않구요.

상대 : 갑자기 전화해서 놀라셨죠?

나 : 네 되게 생각지도 못한 전화가 와가지구요.


여기까지는 연락의 취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 사람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문자 내용을 가볍게 생각했고 문자를 받고 이미 몇 주나 지난 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을 들었을 때 곧바로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상대 : 혹시 모임장이 보낸 톡 보셨나요?

나 : 아 네네. 그 몇 주 전인가 그때 연락이 왔었어요. 내 연락처를 걔가 알려줬구나.

상대 : 그렇습니다. 제가 그때 카카오톡을 보내려고 했는데 연락처를 저장해도 카카오톡 친구추가가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저를 차단했나 싶어 가지고 그냥 그러려니 지내고 있다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가 필순님한테 실수한 게 전혀 없는데 차단을 왜 했을까 계속 고민하다가 용기 내서 전화드립니다. 한 번은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나 : 아뇨, 저는 차단 안 했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카카오톡 친구 추천 허용을 해제를 해놔서 그것 때문에 뜨지 않는 게 아닌가 싶네요. 제가 차단했을까 봐 오해를 하셔가지고 신경을 많이 쓰셨나 봐요.


정확히는 '전화번호로 친구 추가 허용' 해제가 되겠다. 뭔가 혼자서 오해를 하고 신경 쓰던 것을 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가끔 이런데 꽂히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 오죽했으면 늦은 저녁 시간에 이렇게 전화를 했을까. 이 오해를 풀어줘야 한다. 일단 더 들어보기로 하자.


성대 : 그러면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십니까?

나 : 주말에 일정이 있어요.

상대 : 그럼 평일에도 시간 안 되십니까?

나 : 네.

상대 : 이번주 안 되면 다음 주에라도 어떻게 시간 안 되십니까?

나 : 어 그게...


순간 아차 싶어졌다. 만나자는 얘기가 나오자 상대방의 모든 의도가 완벽하게 파악 돼버렸다. 단순히 신경 쓰이는 것을 풀고 싶어 하는 게 다가 아니라, 나랑 만나고 싶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호감 표시다. 이제야 몇 주 전에 받은 문자 내용과 현재의 상황이 연결된다. 몇 주 전 모임장으로부터 받았던 그 문자 내용을 다시 복기해 본다.


모임 안에서 서로 간에 접점도 딱히 없었던 것 같고, 일대일 대화를 나누거나 개인적으로 따로 만나본 적도 없으며, 특히 고백을 하는 시점이 내 입장에서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진심이었구나. 여기서 이야기를 더 끌면 안 된다. 최대한 빨리, 그러나 예의를 갖춰서 거절할 멘트를 찾아야 한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 한마디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모임장에게 그 문자를 받았을 때 '연락처를 알려주지 말아라' 라는 말 앞에 '현재 만나는 사람이 있으니까' 라는 말을 덧붙여야 했나 싶기도 하다. 그랬다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지도. 괜히 누군가를 몇 주간 혼자 고민하게 만들지 않았을지도. 하지만 굳이 그 사람에게 내 개인신상을 말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쓸데없이 말 한마디 덧붙였다가 그 사람이 누구냐고 꼬치꼬치 물어보며 귀찮은 대화가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일은 벌어졌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이 상황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


상대 :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가 부담스럽다고 하시면 바로 연락처 삭제하겠습니다. 모임장한테서 연락받았을 거고 지금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필순님한테 좋은 감정이 있어가지고, 용기를 많이 내서 전화를 걸었구요.

나 : 제가 최근에 만나는 사람이 생겨서요.

상대 : 제가 안 좋은 타이밍에 전화를 걸었네요. 그럼 잘 지내세요.

나 : 들어가세요.

상대 : 네.


내 대답을 듣자마자 아, 하는 탄식이 느껴졌다. 굳이 상대방에게 싫은 소리를 내뱉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 잘했다. 내가 이 사람에게 뭔가를 무상으로 얻어먹고 내뺀 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헷갈리게 해서 희망 고문을 하게 만든 것도 아니니, 굳이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다.




오래된 일이라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과거에 일 년 남짓 다녔던 회사에서 내 바로 윗 직렬인 주임이 내게 호감 표시를 했던 일이 떠오른다. 그 사람은 내게 직설적으로 고백을 못 해서, 주변 사람들을 많이 끌여들였다. 특히 나와 동갑내기인 입사동기 남자가 그 사람과 나를 엮어주기 위해서 중간에서 애를 많이 썼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 책상 위에 신분을 밝히지 말고 직접 만든 음식이나 요구르트 따위를 몰래 갖다 놓는 방식으로 애정 표현을 하기도 했는데 이 사실은 시간이 한참 지난 뒤 다른 직원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됐다. 나는 출처도 모르는 그 음식을 생각 없이 먹었다. 사무실에 누가 단체로 음식을 돌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대략 두어 번 정도.


그 당시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회사에 파다했다. 내가 일을 성실히 잘한다며 나를 마음에 들어 하던 상무는 그 사람과 나의 나이차를 들먹이며 '필순씨가 너무 아깝다, 필순씨 만나려면 주임이 지금 받는 월급을 다 갖다 바쳐도 모자라다' 라고 말했고, 관리부의 경리는 나더러 주임 정도면 괜찮지 않냐고 괜히 나를 떠봤다. 나는 그 당시 만나는 사람이 없었지만 딱히 연애 욕구도 없고, 가뜩이나 없는 연애 욕구를 쥐어짜 낼 정도로 그 사람이 썩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호감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거절 의사를 똑바로 전달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그 사람을 포함하여 몇몇 회사 사람들에게서 상당한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철이 없어서 욕먹을 짓을 많이 한 것 같다. 나에게는 침묵, 외면, 회피, 소극적인 태도 따위가 거절 의사로 쓰이는데, 누군가에게는 그게 암묵적 동의, 가능성 암시로 인한 희망고문 따위로 받아들여진다는 걸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차례 느꼈다.


최근의 일화도 그렇고 과거를 돌이켜봐도 그렇고 고백 거절에는 확실히 애인이 치트키다. 애인이 있는 상태여야지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는다. 거절은 몹시 피곤한 일이다. 애인이 없는 상태에서 상대방을 거절하기 위해서는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설명을 아니 해명을 해야 한다. 만약 그때 내게 애인이 있었다면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라는 단 한마디 말로 상대는 상처를 받지 않고 나는 아무 비난도 받지 않으며 그 상황을 깔끔하게 잘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상식적으로는 대부분 통하지 않을까 싶다.


애인이 있는 걸 어필하고 다니면 애초에 고백을 받을 일이 없고, 설령 애인유무를 잘 모르고 고백한다고 해도 사실은 애인이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끝이다. 물론 그걸로 끝나지 않는 예외의 경우도 있기야 하겠지만 상식적으로는 대부분 마음을 접을 것이다. 애인이 없는 상태에서 상대방의 고백을 거절하려면, 상대방이 왜 싫은지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 즉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굳이 내 입에서 꺼내야 한다.


내가 좋다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고 또 나쁜 사람이 되어서 불이익을 당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신중하게 말을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꼴에 눈이 높네, 튕기네, 주제파악 못 하네, 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한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애인을 들먹이며 상대방의 고백을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잘 알겠다. 물론 최근에 내가 꺼낸 저 말은 다행스럽게도 거짓말이 아닌 진짜다.


다시는 혼자인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제는 더 이상 왜 애인이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도대체 연애도 안 하고 뭐 하고 사는지를 설명하고 싶지도 않으며, 마음에 들지도 않는 사람들을 어렵사리 거절하면서 비난받고 싶지도 않다. 만약 또다시 혼자가 된다면, 이제는 가상 애인이라도 만들어서 혼자가 아닌 척하고 돌아다녀야 하나 싶다. 물론 그렇게 하면 점점 더 새로운 애인을 사귈 기회는 사라지고 고립되겠지만, 뭐 어쨌거나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 라는 노래가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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