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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순이 Oct 27. 2023

고교동창들

환경이 바뀌면 인간관계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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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때 남자 2명, 여자 2명 이렇게 총 4명의 20대 대학생들이 내가 다니던 학교로 교생실습을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중 남자 1명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면담이랍시고 따로 불러서 1대 1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교생은 내게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생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셨고, 그 영향으로 자신도 교사를 꿈꾸게 됐다고 했다.


나는 그 교생에게 성격이 내성적이고 친구가 없고 자신감이 없고 졸업 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놨던 것 같다. 내가 어떤 고민을 털어놓았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 무슨 대답을 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며칠 뒤 교생들이 학생들에게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과 친한 친구 이름을 종이에 써서 제출하는 과제를 줬다. 나는 친구라 생각되는 사람이 없어서 백지로 제출했다. 그 종이를 제출한 이후 교생과 또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교생이 내게 "지금껏 내게 왜 친구가 없다고 했느냐. 네 이름을 적어낸 애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라고 말했다. 한두 명 가지고 저런 반응을 보였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내 이름을 누가 써서 냈다는 건지 내가 딱히 물어보지를 않아서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내 이름을 적었는지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다.


과거 기억을 쥐어짜보니 왠지 내 이름을 써서 냈을 것 같은 인물이 대략 3-4명 정도는 떠오르긴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연히 같은 반에 편성되어서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친구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그때는 친구에 대한 개념을 뭔가 특별하게 가깝고 정서적으로 교류를 해야만 하는 사이 정도로 너무 고차원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친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졸업 후 성인이 되어서도 만남을 이어가는 학창 시절 동창이 없다. 성인이 되어서 알고 지내게 된 주변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래도 최소 한 명 정도의 동창과는 성인이 되어서도 인연을 이어간다고 한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지만. 스무 살 때는 일단 한 명이 있었는데 1년 정도 연락하고 지내다가 내 일방적인 소통 거부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 친구와 나는 맞는 구석이 너무 없어서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계속 연락을 취하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이어졌다. 친구는 고등학교 때는 안 그러더니 성인이 되고 나서는 사치와 문란의 길로 빠지기 시작했다. 본인이 만나는 남자들 이야기, 클럽 다니는 이야기 외에는 나눌 대화 주제가 전혀 없었다. 같이 있으면 재미없고 지루해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점점 사라졌다. 그때는 어떻게 이 관계를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결국 뚜렷한 의사 표현을 하지 않은 채 그 친구의 연락을 거부하는 방법을 써버렸다.


약속을 잡아놓고 잠수를 타는 정도로 무책임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오는 연락을 받지 않았을 뿐이다. 친구는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받을 때까지 집요하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고, 얼마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대략 10통 정도의 부재중 전화가 뜰 때까지 전화기가 계속 울리다가 이내 멈췄다. 연락이 안 되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냐고 걱정하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오는 것도 딱히 아니었기에 내가 자신의 연락을 거부하고 있음을 대충 눈치채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친구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냉정하기도 하고 미성숙하기도 하다.


하지만 면전에 대고 성격이 마음에 안 들어서 도저히 만나지 못하겠으니 앞으로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싫은 소리를 하면서 내 마음도 불편하고 그 친구에게도 상처를 주는 일이 과연 옳은 행동이었을까.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똑같을 텐데 이런 침묵의 방식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어쨌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뒤로 그 친구에게서 다시는 연락이 안 올 줄 알았는데, 몇 년 후 친구가 본인 결혼식을 앞두고 연락이 와서 잠깐 연락을 주고받다가 내가 결혼식에 불참하니 다시 자연스럽게 연락을 하지 않게 됐다. 남자를 소개해준다고도 했었는데 이 친구가 만나는 남자라니 도무지 신뢰가 안 갔다.


이십 대 중반쯤 또 다른 동창으로부터 안부연락이 왔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도 SNS였던 것 같다. SNS가 워낙에 발달하다 보니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이제는 살아있는 이상 잠적하기가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는 나와 연락이 닿던 그 시기에 족발집에서 주방일을 했고, 여러 마리의 유기견과 유기묘를 데리고 판잣집을 전전하며 살고 있었다.


그 친구와 잠깐동안 비대면으로 연락하고 지내며 만날 날을 기약하다가, 내가 어쩌다 꺼낸 말을 친구가 거절의사로 오해하고 잘못 받아들이고는 만남이 무산됐다. 나도 굳이 정정하지 않았으니 그 친구를 그다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텐데, 그때는 사람을 만나는 게 귀찮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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