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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Aug 03. 2017

바닷가 노동자 1일 차

2017년 8월 2일

바닷가 노동자 1일 차




1.

또, 변산바람꽃. 거의 계절마다 이 곳에 왔는데 이번엔 느낌이 좀 다르다. 드디어 첫 날. 조금은 긴장된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시간이 참 많이 달라질 테니까. 무얼 얻어갈 수 있을까. 나에게 큰 변화를 주는 한 달이 될 수 있을런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부담만 커진다. 사실 나는 좀 내려놓고 싶어서 여기 온 거 아니었나.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말이다. 결국은 정말로 쉬고 싶었던 것일 테다. 걸리는 것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변산행을 결정한 건,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게 내가 그토록 부르짖는 '멈춤'이기 때문에. 어디 안 가고 말없이 기다려주는 서해 바다 앞에서, 한 번 멈춰봅시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공간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선물해줄 이곳에서 가만히 숨 고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 세상사 그렇듯 쉽지 않겠지만, 이번 여름은 조금 특별할 것 같지 않나요. 





2.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만남이 이어졌다. 지훈이 형, 그리고 랄프와 야니카. 지훈이 형은 준규 형의 가장 친한 고등학교 친구로 2주 째 이 곳에 머물고 있다. 랄프와 야니카는 월요일에 온 독일인 부부 손님. 모두 처음봤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었기에 세세한 대화를 나눌 겨를도 없이 차를 타고 식당으로 향했다. 아, 참, 식당 가기 전에 준규 형 아버님이 정기적으로 거래하신다는 복숭아 농장에 들렀다. 구매하기로 한 복숭아 두 박스를 가지러 갔는데 사장님께서 외국인 손님까지 있다며 그 자리에서 복숭아 맛도 보여주시고 농장 구경까지 시켜주셨다. 복숭아 농장을 구경한 건 나도 처음이라 랄프와 야니카 만큼이나 신기하고 재밌는 마음에 사진도 찍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농장까지 가는 길과 농장 주변으로 펼쳐진 경관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서 (늘상 보는 풍경이라 무덤덤한 준규 형 빼고는) 우리 모두 연신 감탄을 뱉었다. 여행자가 된 기분이라 조금은 설렜다. 




3.

저녁밥은 '신사와 호박'이라는 조그만 식당에서. 연잎밥과 뽕잎 고등어구이 정식. 고등어는 원래 내가 생선구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그냥 그랬지만 연잎밥은 예상보다 맛있었다. 밥이 어찌나 찰지던지 몇 번 숟가락 뜨니 바닥이 보이더라니까, 글쎄. 그건 그렇고 랄프와 야니카를 지켜보는 일이 재미있었다. 준규 형 아버님이 연잎밥을 먹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는데 둘이 열심히 듣고 따라하는 거나 낯선 모양의 반찬들 앞에서 최대한 당황하지 않고 도전해보려 애쓰는 모습이 그저 귀여웠다. (연잎밥을 처음 먹어보는 나와 지훈이 형도 외국인 여행자마냥 열심히 따라하긴 했지만 그건 별로 안 귀여웠을 거다. 기분 탓인가요.) 훈훈하게 생긴 서양 사람이라 귀여운 건지 아무 것도 모르는 외국인 여행자라 귀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귀여운 건 귀여운 거니까. 





4.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격포항 데크를 걸으며 바라본 저녁노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풍경 속에서도 가장 짙게 내 마음에 드리운 건, 결국 그리운 얼굴들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헤어진 우리 가족과, 지금 이 하늘의 색과 파도의 소리를 꼭 나누고 싶은 해서. 다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며칠 전 메모한 것처럼, 모든 귀중해서 그리운 것들은 하루가 저물 때 찾아든다. 어쩌면 내가 노을을 사랑하는 이유일지도. 스러지고 저물어가는 순간 속에서 나는 언제까지고 곁에 머물러줬으면 하는 것들을 떠올린다. 붉은 해는 떠나가도 당신들은 어디 가지 말고 거기 그대로 있어달라고. 그렇게 가만히 되뇌여 보는지도 모른다. 




5.

오늘 밤 수다의 안줏거리는 기린 이치방과 멕시칸 치킨 닭강정. 준규 형과 지훈이 형이 두 달 전 다녀왔던 일본 여행 이야기로 신나게 떠들며 밤을 마무리했다. 다들 피곤한 지라 오늘은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든다. 앞으로는 얼마나 일찍 잘 수 있을런지. 뭐, 이제 시작이니까. 그래, 시작. 걱정도 기대도 한껏 부풀어 오른다만, 이왕이면 다시 돌아갈 때 홀가분한 마음이라면 좋겠지만, 일단 자자. 푹 자자. 지금은 바다도 자고 있으니까. 내일 다시 이야기해보자구요.    





                                                                                                                        2017. 8. 3

                                                                                                                         2: 17 AM






덧.

1) 나 영어 진짜 못해. 겁나 못해. 제발 영어공부 좀 합시다.

2)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천천히 걷는 두 사람이란 솔직히 그게 누구라도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3) 내일 아침 식사 준비부터가 바닷가 노동자로서의 본격적인 시작이지요. 7시 반 기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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