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essa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현 Jul 23. 2017

2017년 7월 22일 토요일




오늘은 또 어떻게 보내지. 돈이 없다. 단기 알바를 못 구했다. 하루하루가 걱정이다. 돈만 여유 있었다면 재밌게 잘만 보냈을텐데. 소문내고 다닐 정도로 즐겁게 보낼 자신 있다고. 자신은 있는데 돈이 없다. 서럽지만 뭐 없는 건 없는 거니까.  


그래서 헌혈했다. 영화표를 받아 영화를 보러 갈 심산이었다. 이리저리 고민 끝에 고안해낸 괜찮은 방법. 좋은 일도 하고 공짜 영화도 보고 이런 게 딱 일석이조잖아. 아니, 일석삼조인데요? 영화표에 SPC 외식상품권(무려 3500원짜리입니다!)까지 받았다. 파리바게뜨나 던킨도너츠 등에서 사용 가능하댄다. 커피 한 잔은 마실 수 있겠군. 헌혈의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이내 고민에 빠졌다. 영화표는 다음 주에 쓸까. 해서랑 <내 사랑> 보기로 했는데. 그럼 오늘은 뭘 해야 하는 걸까. 하고 싶은 건 많다. 문제는 돈이 안 들어가야 된다는 거다. 돈 안 내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무료...무료...무료..아! 서울이 좋은 수많은 이유들 중 하나가 문화생활의 기회가 많다는 것. 지방에서 상경한 이들이라면 다들 공감하겠지. 그만큼 무료로 누릴 수 있는 전시들 또한 잘 갖춰져 있다. 무료전시라니. 네이버에 검색했다.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이라이트' 까르띠에 재단 기획전이 진행중이었다. 이게 무료였구나. SNS에서 몇 번 본 적 있지만 별 관심 없던 전시였다. 급관심이 생겼다. 더구나 서울시립미술관이라면 근처에 던킨도넛츠 매장이 있지 않은가. 여유 있게 전시 감상한 뒤 커피 마시면서 노트북을? 아주 완벽한 (공짜) 토요일 오후겠군요. 그렇게 나는 회기역으로 향했다. 


날은 생각만큼 더웠고 전시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는 미술에 관해서라면 '좋네, 와, 멋있다, 이건 좀 큰데, 뭔 뜻이지' 하는 정도의 수준 밖에 안되지만 그런 비루한 안목으로 보기에도 꽤나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았다. 레이몬드 드파르동이 담아낸 프랑스 소도시들의 정경, 론 뮤익이 구현해낸 극사실주의 조각 인간들, 파킹 찬스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탄생된 공동경비구역 JSA 등 기억해뒀다가 따로 관련 정보를 찾아보고플 정도의 것들도 더러 있었고.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물론 거슬리는 부분도 없진 않았던 게 사실이다. 주말과 무료전시의 여파로 관람객이 너무 많았던 데다 그 중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나의 여유로운 감상을 방해하는 눈살 찌푸려지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해야 하는데, 뭐 이쯤 해두자. 다음에 본격적으로 신명나게 깔 기회가 있기를. 여튼 간에 정말 짜증나는 인간들이 어딜가나 꼭 있다. 

 

나와서는 던킨도너츠에 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사용하기도 황송한 외식상품권 덕에 200원이면 가능했다. 커피값을 계산할 때 100원짜리 동 전 두 개를 건네는 그 쾌감이란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사실 제 값 내고 마셔도 아무 느낌 없는 사람이고 싶은데 말이지.) 기분 좋게 들이킨 아메리카노는 좋은 기분과는 전혀 상관없이 독특한 맛을 내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200원이잖아, 하고 자위했다. 던킨도너츠가 도넛만 맛있으면 되죠, 뭘. 맛있는 도넛 두어 개 쯤 먹을까 했지만 3초만에 그만뒀다. 서럽지만 네, 없는 건 없는 거니까요.  


커피를 마시면서 쇼미더머니를 봤다. 욕하면서도 맨날 챙겨본다. 진짜 엠넷 제작진은 해도 해도 너무한 놈들인데, 그걸 해도 해도 너무한다면서 꾸역꾸역 챙겨보고 네이버TV 들어가서 클립 영상까지 두 번 세 번 씩 돌려보는 내가 진짜 너무한 놈이다. 그럼에도 염치 없이 이번 방송에서 인상적이었던 걸 추려보자면. 일단은 펀치넬로 탈락이 제일 아쉽다. 말도 안되는 무대 보여줬는데 예상치 못한 재대결에서 말도 안되는 실수를 보여줬다. 첫 번째 무대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올드스쿨 느낌 진하게 풍기는 붐뱁 비트가 잘 어울릴 것 같지는 않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어떤 비트든 다 소화하는, 그냥 랩을 정말 잘하는 래퍼인 거 같다. 두 번째 무대에서 실수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알고나니 본인이 제일 서글펐겠구나 싶어 안타깝다. 어머님 상태 많이 호전되셨으려나. 얼른 마음 잘 추스리고 싱글이나 정규앨범으로 만나보고 싶다. 아토의 탈락도 아쉽다. 하필 넉살을 만나서. 누가 넉살이랑 대결하는데 가사를 안 까먹을 수 있을까. 이전까지는 한국의 여자 래퍼 중에서 (당연히 윤미래는 제외하고) 트루디가 가장 잘한다고 여겼는데, 이 분은 대체 어디 숨어 있다 나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많은 여성 래퍼들의 특징-앵앵거리는 목소리로 허세에 가득 차서 쎈 척 범벅의 가사를 불분명한 딕션으로 뱉는 모습-이 전혀 없다. 딕션도 그루브도 여유도 다 수준급. 지코가 힘줘 말한 것처럼 아토는 이번 방송의 최대 수혜자가 될 수도 있겠다. 다음 시즌 언프리티 랩스타에 나올 거라는 건 전국민이 다 예상하겠지. 여튼 간에 이번 시즌도 재밌다. 초반보다 갈수록 더 흥미로워진다. 이게 문제다. 엠넷 망할 놈들. 능력 하나 만큼은 인정합니다.  


10시가 다 돼서야 집에 왔다. 저녁밥은 편의점에서 사온 삼각김밥 두 개와 고기고로케 하나. 뭘 사먹어야 되나 거리를 배회하다 문득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삼각김밥 맛있게 먹었다. 고기고로케도 나쁘지 않았다. 5분 만에 다 먹었다. 이마저도 금방 배가 꺼져서 지금 배가 많이 고프지만 이것 또한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자면 된다.  


정리해보면, 점심에 먹은 부리또가 3700원이고 저녁이 3600원이다. 커피 마시는데 200원을 썼으니, 가만 있자, 오늘의 총 지출은 교통비를 제외하고 7500원이로구나. 이 정도면 장하다. 줄어든 잔고는 내일 생각하자. 오늘만큼은 밥 두 끼에 전시 보고 커피까지 마신 알찬 하루였다. 남 부럽지 않은 토요일 하루가 간다. 돈 없는 스물 넷 청년의 즐거운 하루. 나는 잘 살고 있다. 정말 그런가? 그래도 오늘은 용케 울지 않았는 걸요. 

매거진의 이전글 까만 거실의 말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