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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Aug 05. 2017

바닷가 노동자 3일 차

2017년 8월 4일  

바닷가 노동자 3일 차 





1.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것이다. 손님들 조식을 준비하고 나면 얼마 간 여유로운 시간이 생긴다는 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커피를 앞에 높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게 제일이다. 볕이 드는 데크를 바라보며 다양한 주제를 오가는 대화를 나누는 일은 늘 즐겁다. (물론 요즘 같은 날엔 반드시 에어컨 바람 아래 앉아야 하겠지만요.) 우리가 각자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카페 공간의 분위기부터 시작해서 나는 이 한 달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야 할까, 그리고 그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등 이야기는 자연스레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단순히 흥미로웠던 걸 떠나 의미가 깊었던 시간이다. 힘이 되었으니까. 준규 형은 나를 가능성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기꺼이 나를 이 곳으로 불렀고, 이후에는 휴학을 한 뒤 서울에서든 어디서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해보기를 바라고 있다. 가능성이 많은 사람. 나는 잠재력이 무한한 사람. 기분 좋은 말인데 그것의 실체를 더 확실히 확인하고 껴안으려면, 결국 뛰어들어 봐야 할 테다. 해봐야 알 수 있다. 아, 내가 정말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자유롭게, 이렇게 원없이 해보니 나는 참 탁월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겠구나. 


조금 가슴이 뛰었던 걸 부정하지 못하겠다. 정오를 향해 가는 볕이 유독 더 아름다워 보였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진심 어린 말은 그런 힘이 있다. 소리없이 파고들어 밑에서부터 조금씩, 천천히 흔든다. 분명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겠지. 나를 둘러싼 현실과 내 마음 속을 꿈틀거리는 욕망 사이를 냉철하게 가로지르며 답을 찾는 과정. 이번 여름이 특별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어느 때보다 어려운 이유도 거기에 있고. 아,참. 준규 형은 고민보단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는데.  




2.  

드디어 커피를 내려봤습니다. 항상 커피 배우고 싶다 배우고 싶다 노래를 불렀는데,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커피 드립을 배운 것이죠. 에스프레소 머신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상황에서 핸드 드립부터 익혔지만 위대하신 서 은사님 말씀에 의하면 핸드 드립부터 들어가는 게 정도(正道)라고 하니까, 전 잘하고 있는 겁니다. 


네, 정말 설렜습니다. 별 거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제 손으로 직접 내리는 커피라니요. 과정 자체는 복잡할 게 없으나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라 그만큼 긴장도 많이 됐답니다. 방법은 이러합니다. 먼저 로스팅된 원두를 계량에 맞춰 도저에 옮겨 담은 뒤 그라인더에 넣습니다. START 버튼을 누르고 도저를 입구에 끼우면 10초도 안되어 곱게 갈린 원두가 나오죠. 그걸 필터를 고이 접어놓은 드리퍼에 담아주면 이제 뜨거운 물을 붓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꽤나 어렵거든요. 원두의 가운데 부분으로 시작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듯 붓고, 기다리고,(아주 잠깐이니 한 눈 팔면 안된다구요!) 다시 붓는 식의 반복인데, 그걸 아주 천천히, 적절한 위치와 방향을 찾아가며 해야 합니다. 보기엔 쉬워보여도 막상 하려니, 흠. 애초에 이 마이너스의 손으로 뭘 한다는 것도 웃기지만은 느린 호흡과 균형 있는 드립이라는 게 도통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당연히 맛은 좋지 않았습니다. 일단은 해봤다는 데 의의를 두는 거죠. 그래도 저녁에 한 번 더 내려봤는데 다행히 처음보단 나았습니다. 얼음 덕분에 시원해서 맛이 가려진지는 모르겠으나, 서 은사님께서 훨씬 안정된 부분이 있다며 독려해주셨어요. 이제 시작이겠죠.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변산바람꽃 1개월이면 손님들에게 한 잔 다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커피는 내어줄 수 있을 겁니다. 언젠가는 핸드 드립계의 장인이 되는 날도 올 수 있지 않겠어요? 






3.  

점심을 먹기 전 객실 청소를 했다. 롯지 4번 방에 에어비앤비로 오는 손님들이 있단다. 그분들이 도착하기 전에 엊그제 떠난 랄프와 야니카가 썼던 방을 깨끗이 청소하면 된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준규 형과 지훈이 형, 재휘, 나까지 남자 4명이서 나눠서 하니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청소기와 밀대로 바닥을 싹 밀고 조그만 걸레로 창틀이나 선반 등을 닦거나, 이불보와 베개 커버를 뽀송뽀송한 것으로 교체하고 화장실까지. 객실 전체가 아주 깔끔하니 보기 좋았다. 넷이서 해서 금방 마무리 되긴 했지만 이것 참 쉬운 일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이걸 준규 형은 모두 혼자 하고 있었다니. 좋아서 하는 일임에도 많이 힘들어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 게스트하우스 스탭 일 따위 절대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다. 세상 일에 쉬운 게 어디 있겠냐만.  






4.  

오후는 꽤나 길고 나른했다. 네 명 다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으며 가끔 졸았다. 움베르트 에코가 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는 에세이를 읽고 있다. 고것 참 재밌더군요. 모든 글이 와닿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유머러스 한 게 킬킬대며 읽어나가기 좋습니다. 시니컬한 어투와 뚱한 표정으로 매우 디테일한 불만들을 뱉어내는 게 빌 브라이슨의 글을 보는 느낌도 들고. 음악은 코드쿤스트와 Jazziuf를 주로 들었다. Jazzinuf는 유튜브에서 우연히 발견한 프로듀서인데 부드럽고 편안하면서도 매우 세련된 느낌의 비트를 찍는다. 재즈 분위기 물씬 풍기는 힙합 곡들을 좋아하는 나에게 제격이다. 사운드 클라우드 계정의 거의 모든 곡들을 재생시켜놓고 책을 읽었는데 대체로 귀를 잡아끄는 것들이라 제목을 확인하곤 했다. 자주 듣게 될 것 같다. 그나저나 무료한 시간이 찾아오면 꽤나 졸리단 말이지. 조식 준비를 돕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다보니 오후 시간엔 이렇게 졸음이 찾아온다. 아니, 혹시 책을 집어들어서 그런 건가. 그런 거라면 좀 슬프지 않습니까.     





5.  

오늘 밤의 마무리는 포구에서의 고기 파티. 우리 넷과 준규 형 아버님, 고모부님, 안도현 선생님까지 총 7명의 남자들이 작당 포구 한 쪽에 자리를 깔고 앉아 삼겹살과 목살을 구워 먹었다. 말 그대로 불타는 금요일 밤. 은둔형 고수이신 고모부님이 구워주신 고기맛은 말할 것도 없고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한 여름밤을 더할 나위 없이 만들어주었다. (물론 계속 불어주는 게 아니라서 땀이 날 때도 있었지요. 그건 비밀입니다.) 하지만 이 밤의 하이라이트는 모기가 없었다는 거. 이 계절에, 이 더위에, 모기 한 마리 없었다! 얘기를 듣자하니 바다 쪽으로 꽤나 깊이 들어왔기에 없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염분이 강하고 파도가 치는 바다 안쪽은 그들이 놀기에(?) 굉장히 척박한 환경일 테니까. 밝은 가로등 아래 자리를 잡았음에도 전혀 고통 받지 않아도 돼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자그마한 벌레 친구들이 많긴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수시로 눈에 띄었는데, 심지어 지네 비스무리한 놈은 내 그곳을 향해 돌진하기까지 했다. 이 요망한 것. 


어제 과음한 탓에 일부러 술을 조금만 마시고 있는데 고모부님께서 물어보신다. 이래놓고 여자친구랑 같이 와서 먹으면 좋다고 들이부을 거지? 네, 당연하죠. 해서가 미치도록 보고싶었다. 밤을 사랑하는 너와 조용한 포구에서 단 둘이 술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 나누며 음악을 듣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너랑 보내는 것만큼 행복한 밤은 없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또 벌레가 내 그곳을 탐하려 하는 것도 모르고 분위기에 취해 있었을 거야. 


아, 참 안도현 선생님이 의외로(?) 요조를 즐겨 들으신다. 특히 패티김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곡이라고 들려주신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마음을 끌어들였다. 정재일과 함께 작업한 곡 같던데 후에 다시 들어봐야지. 이것도, 해서랑 밤에 같이 듣고 싶은 걸요. 음악도 너랑 듣는 것만큼...말 안해도 알지?  




6.  

새로운 인연이다. 재휘. 준규 형을 통해 몇 번 얘기 들었을 때도 대충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더 통하는 구석이 많은 듯 싶다. 특히 음악 코드가 잘 맞는다. 역시 음악. 역시 준규 형 친구. 이승환과 김동률과 박정현과 쳇 베이커와 블로섬 디어리를 들으며 신나게 대화에 빠져들었다. 아, 만년필 선물도 받았다. 너 글쓴다며? 뜬금없이 묻더니 검은색 만년필 한 자루를 건네는 거 아니겠어요. 너무 고마웠지만 어설프게 마음을 숨기며 몇 차례 튕기다 이내 행복하게 들여다보았다. 만년필은 처음인데. 뜻밖의 선물은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기쁨이구나. 말은 안했지만 사실은 선물보다도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난 기쁨이 더 크다는 거. 다들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겠습니까. 네, 정말 기쁜 밤입니다.  

                                                                                                                           




                                                                                                                        2017. 8. 5

                                                                                                                          6:27 PM





덧.

1) 그러고보니, 커피 드립 연습한다고 오늘만 3잔을 넘게 마셨다. 아프지마, 내 위야...

2) 물까치 악단 커밍순. 나만 잘하면 되는 거죠. 오아시스의 Champagne Supernova와 라디오헤드의 No Surprises가 후보. 비루하지만, 나름대로 건반 연습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해본다.(사실 저는 팀내 비주얼을 맡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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