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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Sep 09. 2017

계란 프라이 견습생





라면 말고도 하나쯤은 더 있을 거라 믿었다. 할 수 있는 요리 말이다. 이를테면, 계란 프라이. 얼마나 쉬운가. 툭, 껍질 깨고, 열고, 떨어뜨린다. 적절히 뒤집기만 하면 끝난다. 실패할 수가 있나? 요리라는 게 별거 있겠습니까. 이제야 알았다. 내가 오만했다. 아니, 순진했다.      


바닷가 노동자가 되었다. 넓은 서해바다를 껴안은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목조주택. 친구 J가 아버지와 함께 운영하는 숙박시설에 나는 8월 한 달 간 머물렀다. 이전에도 자주 놀러 왔는데 이번만큼은 일을 돕기로 했다. 일종의 ‘노동자’ 신분인 셈이다. (내가 이름 붙였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그간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들을 접할 거라는 기대감이 컸다. 이곳은 각종 노동을 비롯한 다양한 체험의 기회가 가득하니까. 바다가 나를 부른다. 네, 갑니다.  


사실 결정하기 힘들었다. 돈이 나를 괴롭혔다. 이번 달 자취방 월세와 방학 이후에 필요한 생활비가 아른거렸다. 변산에 내려가면 돈을 못 번다. 숙식을 제공받으니 돈 쓸 일은 없지만 그렇기에 벌지도 못한다. 그냥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할까. 취업 관련 고민 때문도 아니고 그런 걸로 머리 싸매는 내가 미웠다. 밤새 서러웠다.  


어쩌면 간단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답을 알면서도 외면해왔을 거다. 네 마음은 이미 기울어진 것 같은데? 신뢰하는 사람이 말했다. 몇 번의 계산과 몇 번의 한숨을 거치고 나서 결론을 냈다. 내려가자. 포기할 수 없었다. 이건 정말이지 붙잡아야 하는 기회다. 나는 나의 정직한 욕망을 따라갔다.    

해봐야 안다. 여기서 제대로 체감했다. 풋내기 노동자로서 그저 새롭기만 한 일들을 하나하나 구경하고 시도하기에 바쁜 시간이었다. 해보고 안해보고는 이토록 다르구나. 작고 사소해도 하나하나 배워가는 과정, 이런 게 나의 세계를 넓혀간다. 한 뼘 씩 넓어질수록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예컨대 노른자가 터지지 않은 계란 프라이가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요리 하나 못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한테는 쉽다. 유복한 가정에서 오냐오냐 자란 것도 아니면서. 계란 프라이 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나는 그마저도 시원찮다는 걸 깨달았다. 툭 터진 노른자가 퍼져버리는 꼴을 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 제대로 금이 가게끔 껍질을 깨뜨려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고 편하게 여는 것, 팬과 가까운 높이에서 떨어뜨려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걸 뭐 대단한 것 마냥 얘기하느냐고 묻는다면 이거 참 송구스럽다. 번번이 실패했다. 엄지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어찌어찌 잘 넘어가도 무의식중에 높은 위치에서 떨어뜨렸고 노른자가 성할 리 만무했다. "괜찮다"라는 J의 말이 “제발 좀”으로 들린 건 기분 탓인가. 수련에 돌입했다. 계란 두 개를 바닥에 깨뜨렸다. 짜증 나도 패인을 분석하며 비장하게 불앞에 섰다. 지금은 뭐, 직접 손님들 조식을 만들어드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전 처음으로 전동 드릴을 잡았다. 연거푸 헛도는 대못이 사람 마음 심란하게 했다. 페인트칠은 일상이었다. 우드스테인이니 폴리우레탄이니 하는 것들과 함께, 곧 완성될 오픈 키친의 벽과 싱크대를 발랐다. 간밤에 행복하셨을 커플 손님의 객실을 청소하면서 한동안 못 본 여자친구를 떠올리기도 했고, 앞으로의 공간 운영 방향에 관한 열띤 토론을 밤새 이어간 날도 숱하다. 하여간 잡다하게 많이도 했다.   


해야 할 일들이 다양하게 펼쳐져 있는 날들이었다. 난 그날그날의 일정에 충실했고 대부분 새로 마주하는 것들이라 그 자체로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매일매일이 생산적이거나 보람찼던 것도 아니다. <쇼미더머니>나 돌려보며 하루 종일 뒹굴거린 게으른 하루도, 방학이 끝나면 어떡해야 하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의 시간도 많았다. 요일 개념이 사라질 만큼 느긋하게 지내는 동안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수시로 찾아들었다.   


다만 귀중한 경험이 생겼다. 나의 정직한 욕망을 따라간 경험. 초라한 현실적 여건 틈에서도 기어이 버티

고 있는 내밀한 욕망을 나는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재미를 느꼈다. 재미있어서, 즐거웠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그 외에 일들은 더 이상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거니까. 그걸 알아야 속 편하다. 썩 괜찮은 여름이었군, 하고 말하는 게 마냥 쿨한 척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방학 한 번 잘 보냈다.   

어제는 날이 참 좋았다. 바람은 시원하고 공기는 쾌적했다. 가을이 오는구나. 아, 그나저나. 나 휴학한다. 여기에 두 달 더 머무른다. 가을까지 바닷가 노동자로 남는다는 것. 이게 이번 여름의 의미라면 의미고 변화라면 변화려나. 계란 프라이 드시고 싶은 분들은 주저 말고 찾아오세요. 잘해드릴게.


 




                                                                                        * 대학내일 82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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