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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Sep 05. 2019

메일은 콘텐츠를 싣고

TV는 사랑을 싣던 지대를 지나, 바야흐로 메일이 콘텐츠를 싣는 시대.



메일과 콘텐츠는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고 생각했다. 


메일함을 열어 재밌는 콘텐츠를 감상하는 장면 역시 상상해본 적이 없다. 이메일은 유튜브 채널이나 페이스북 페이지가 아니니까. 대학생들에게 물어보자. 메일을 어떤 용도로 활용하고 있습니까. 과제 제출이요. 발표 자료 저장이요. 그들에게 메일이란 '내게쓰기'라는 이름의 저장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직장인 역시 마찬가지. 메일은 그저 업무와 관련된 툴(tool) 중 하나다. 다른 계정의 메일함을 열어봤자 스팸성 광고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쓰레기 더미만 잠들어 있을 뿐. ‘안 읽은 메일 16,849통'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문구는 덤이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꿀 때다. 메일은 이 시대의 어엿한 ‘콘텐츠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TV는 사랑을 싣던 시대를 지나, 바야흐로 메일이 콘텐츠를 싣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Web Hosting/Unsplash



메일은 구독 서비스에 최적화된 플랫폼이다



메일이 콘텐츠 유통 경로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건 이미 예견된 일이다. 메일이야말로 현재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 중 하나인 '구독 서비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구독이란 마음에 드는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받아보겠다는 의사표시다. ‘콘텐츠 배달’을 신청한다고 표현해도 좋겠다. 한데 이 상황은 우편 시스템을 온라인으로 고스란히 옮겨 놓은 이메일과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한다. 생각해보자. 별도의 웹사이트에 접속할 필요가 없다. 번화가에 위치한 오프라인 스토어를 찾아갈 필요는 더더욱 없다. 침대에 누워만 있어도 흥미 가득한 오락거리가 알아서 내 앞에 도착한다. 지하철에서든, 카페에서든, 구독자는 그저 휴대폰 속 메일함만 확인하면 되는 거다. 어차피 메일함이란 컴퓨터와 휴대폰을 쓸 줄 아는 모든 이들이 습관적으로 들락날락하는 곳 아니었던가.



사회초년생을 위한 경제 미디어 어피티 (출처: 어피티 공식 홈페이지)



사실 메일을 활용한 콘텐츠 구독 서비스는 새로운 게 아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기업들이 뉴스레터를 통해 자사의 잡다한 소식과 브랜드 가치를 담은 글들을 전달해왔다. 최근 들어 주목받는 다양한 뉴미디어 역시 이 뉴스레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독자층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시사 이슈를 정리해 발행하는 뉴닉이나 사회 초년생들을 위한 경제 뉴스를 전달하는 어피티가 대표적 사례. 물론 시사나 금융 분야처럼 다소 딱딱한 내용의 지식 정보를 제공하는 메일링 서비스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는, 가볍거나 사적이거나 감성적인 콘텐츠 또한 오늘도 누군가의 메일함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중이다.



일간 이슬아 한 여름호 포스터 (출처: 이슬아 작가 인스타그램 @sullalee)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메일링 콘텐츠



작가 이슬아는 ‘메일로 받아보는 수필’의 영역을 개척한 메일 구독 서비스의 대표주자다. 그는 <일간 이슬아>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로 하루 한 편, 한 달에 스무 편의 글을 구독자들에게 발송한다. 구독료는 단돈 만 원. 공감을 자아내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틈틈이 세월호 사건이나 채식주의 같은 사회적 이슈에 분명한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때로는 특정 연사와의 인터뷰를 진행하거나 본인이 추천하는 동료 작가의 글을 싣는다. 이슬아는 야심 있는 작가다. 단순히 매일매일 수필 한 편을 써서 보내는 프로젝트 이상의 것을 꿈꾼다. 말하자면 <일간 이슬아>는 하나의 콘텐츠 플랫폼이자 브랜드로서 확장과 진화를 거듭하는 중이다.



일간 이슬아 포스터 모음 (출처: 이슬아 작가 공식 홈페이지)



작가와 독자가 다이렉트로 글을 주고받는다는 신선한 컨셉뿐만 아니라 담백하고도 밀도 있는 문장의 힘으로 <일간 이슬아>는 이른 시간에 성공 궤도에 올랐다. 이 프로젝트로 학자금 대출 빚을 갚았고, 그간 연재한 글들을 묶어 단행본으로 발행한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1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하니, 충성심 가득한 구독자들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 공식 인스타그램 (@alibaba30s)



이슬아 작가의 일일 구독 서비스는 많은 독립 창작자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줬다. 그들 역시 저마다의 재능을 무기 삼아 다양한 방식을 모색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뮤지션이자 영화감독인 이랑이 주도하는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다. 이 프로젝트는 암 선고를 받은 친구를 돕기 위해 기획됐으며, 30명의 창작자가 각각 하루 한 편의 이야기를 준비하여 이를 매달 연재하는 시스템이다. 시, 소설, 에세이, 인터뷰, 만화, 일러스트, 레시피, 사진, 영상 등 각기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크리에이터들이 웬만한 콘텐츠란 콘텐츠는 다 시도한다는 게 가장 큰 특징. 11월까지 이어질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의 인기는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오는 후기들이 증명한다.



출처: at 공식 홈페이지



그런가 하면, 아예 공간에 집중한 이야기를 메일로 전달하는 서비스도 있다. 공간 큐레이팅 플랫폼을 표방하는 ‘at’이 그렇다. ‘멋지고 감각적인 공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최근의 흐름과 맞아떨어지는 콘텐츠로, 하나의 공간을 이야기화해 비주얼 스토리로 소개한다는 컨셉이다. 카페를 비롯해 고유한 개성과 매력으로 주목받는 공간을 선정해 이를 사진과 카피로 담아내며, 그 공간의 분위기와 운영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핵심. 장문의 텍스트보다는 이미지 위주의 콘텐츠를 선호하고, 평소 핫플레이스를 찾아다니는 데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는 서비스다.




당신의 메일함에는 어떤 취향이 쌓여 있습니까


그 외에도 수많은 메일링 서비스들이 하루가 멀다고 쏟아진다. 분야와 형식 모두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구독을 통한 콘텐츠 전달 방식은 꽤 유효할 것 같다. 소비하는 입장에서야 흐뭇할 따름이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늘어나는 건 행복한 고민이니까.


그러고 보면 어느새 메일함을 확인하는 과정마저 취향의 영역으로 들어섰다고 느껴진다. 무엇을 구독하고 무엇을 감상하느냐가 중요해진 시대다. 가끔은 좀 지나치다고 느껴지지만, 이토록 재밌고 유용한 콘텐츠들을 이토록 간편하게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정도의 피곤함이야 감수하고도 남지 않나 싶다. 이제는 서두에 언급한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어쩌면 누군가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당신의 메일함에는 어떤 콘텐츠가 쌓여가고 있습니까?






                                                                                                                    * The ICONtv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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