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가장 쉽고 빠른 도망이 필요할 때

서울의 매력적인 골목길

by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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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가장 쉽고 빠른 도망이 필요할 때




도시를 견디지 못할 때가 있다. 사람이 지겹고 빌딩이 답답하고 소음이 괴로워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드는 도시의 속도와 공기 앞에서 우리는 자주 무력하다. 눈 딱 감고 도망갈 수 있다면 좋겠으나, 어김없이 돌아오는 출근길과 깃털보다 가벼워진 통장을 생각하니 서러움에 눈물만 흐른다.


더더욱 골목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살짝만 걸음을 돌려도 순식간에 작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지니까. 거대하고 화려한 번화가로부터 잠시나마 숨 돌릴 틈을 주는 도심 속 은신처. 가장 쉽고 빠른 도망이 필요할 때 나는 골목을 걷는다. 그래서 준비했다. 지쳐버린 도시인들의 도망을 받아줄, 매력적인 서울의 골목들이다.




Editor 김정현

Photographer 김해서







01 합정동 토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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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는 시끄럽다. 재미있고 풍성한 만큼 소란스럽다. 젊음의 활기가 다소 피곤하게 느껴진 이들이 향한 곳이 바로 합정이다. 그런데 어쩌나. 이제는 카페거리를 위시한 합정의 번화가도 들뜬 얼굴의 사람들로 가득한데. 그래도 걱정 말자. 우리에겐 토정로가 있으니까.


당인리 발전소 앞 한적한 토정로를 걷다 보면 여기가 내가 아는 합정동이 맞나 싶다. 아담한 너비의 도로를 따라 쭉 뻗은 벚나무의 싱그러움과 저마다 다른 매력을 뽐내는 작은 가게들의 개성이 어우러지는 곳. 너무 조용해서 심심할 것 같다는 생각은 넣어두길. 각종 편집숍과 카페, 펍, 브랜드 쇼룸이 골목 구석구석에 숨어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더구나 양화진역사공원 쪽에서 바로 한강 망원지구로 넘어갈 수도 있으니, 산책러버들에게는 이만한 골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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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hould go ㅣ 커피발전소


2009년 5월에 오픈하여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하는 토정로의 터줏대감.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자 다양한 종류의 작업자들이 모이는 편안한 분위기의 공간이다. 친절하지만 시크한 주인장은 항상 책을 읽거나 커피를 볶고 있는데, 그가 직접 내려주는 브루잉 커피 역시 한결같이 훌륭하다. 영화 관련 서적과 아트 포스터가 곳곳을 채우고 있으니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들러볼 것.


• 서울 마포구 토정로 49 / 매일 11:30-22:00

• cpbjs.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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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북촌 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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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은 관광지다. 서울을 찾은 각국의 관광객들이 꼭 한 번은 거쳐 간다. 지금 이 시각에도 북촌한옥마을에서는 아이보다 더 신난 수백 명의 어른들이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물론 그럴 만한 가치와 매력이 충분한 곳이다. 하지만 오래된 동네가 가진 고즈넉한 분위기를 보다 여유롭고 진득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대안이 필요하다. 바로 한 블록 떨어진, 계동길처럼 말이다.


계동길은 안국역 3번 출구 부근 현대사옥에서 시작해 중앙고등학교에 이르러 끝난다. 채 1km가 안 되는 짧은 길을 유유히 흐르는 건 세월의 흔적과 변화. 작고 낡은 가정집과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정겨운 풍경을 이루고, 사이사이로 자리한 젊은 개성과 감각의 공간들은 골목에 생기를 더한다. 가게마다 걸려 있는 주인장의 흑백사진이 눈에 띄는데, 지난해 물나무사진관의 주도로 진행된 ‘정박의 기억 : 계동 2018 지도’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계동떡방앗간]처럼 그 자체로 계동길의 역사인 곳부터 [화양연화], [호랑이 카레] 같은 재기발랄한 가게까지, 계동길의 사람들과 그들이 일궈낸 시간을 기억하고 지키려는 귀한 마음이 골목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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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hould go ㅣ 미미당 북촌호떡


꽤 오랜 시간 계동길을 지킨 귀여운 호떡 가게. 고소하게 풍겨오는 냄새를 그냥 지나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호떡과 떡꼬치 하나씩 입에 문 채 붙임성 좋은 사장님이 들려주는 동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꼭 먼 길을 떠나온 여행자가 된 것 같다. 요즘 힙한 카페라며 [어니언 안국]을 추천해주시고 수줍게 본인 인스타그램 계정도 소개하시는, 멋진 사장님을 만나러 가보자.


• 서울 종로구 계동길 100 / 화-일 10:00-19:00

• @mimidang.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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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한남동 한남대로27가길 & 27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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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은 화려하다. 넓은 대로변을 따라 세워진 빌딩들과 들어갈 엄두조차 안 나는 해외 유명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 거기에 서울의 멋쟁이란 멋쟁이는 죄다 모인 것 같은 이토록 세련된 동네. 그래서 부담스럽다. 갈 때마다 낯설고 나 혼자만 한참을 동떨어져 있는 사람 같이 느껴진다. 그때 걸음을 돌려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한남대로27가길-27길도 세련된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블루스퀘어와 꼼데가르송,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가 위용을 뽐내는 드넓은 이태원로에 비하면, 작고 조용하다. 듁스커피를 취급하는 카페 [33 apartment]와 다양한 플라워 클래스가 열리는 꽃집 [보타니크], 시원한 자메이카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식당과 바버샵이 붙어 있는 [레드 스트라이프 한남] 사이로 요리조리 걷다 보면, 눈은 즐거운데 마음은 편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요컨대 한남대로 27가길-27길은 멋있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감각적이지만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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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hould go ㅣ 웻 커피 Wet Coffee


아이가 휘갈겨 쓴 듯한 귀여운 로고의 입간판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곳. 하얀 타일과 붉은 벽돌을 따라 내려가면 깔끔하고 정갈한 분위기의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시그니쳐 메뉴인 ‘웻 커피’는 숙성을 거쳐 직접 만든 아몬드 우유에 에스프레소를 올려 만든 것이라고. 깊고 진한 에스프레소와 고소한 아몬드 우유의 훌륭한 밸런스를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 서울 용산구 한남대로27가길 10 / 매일 11:00-21:00

• @wetcoffeeseoul






* 하이드어웨이 매거진 Vol.2 The Runaway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