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만 하면 돌아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맘때면 스타벅스에 간다. 경쾌한 캐럴이 나오는 매장을 가로질러 주문대에 선다.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메뉴. 토피넛 라떼. 그제야 깨닫는 것이다. 벌써 연말이네?
스타벅스 토피넛 라떼의 등장으로 나는 한 해의 마무리를 실감한다. 공중파 연기대상 시상식보다 조금 일찍 찾아오는 토피넛라떼 개시 소식이야말로 시원섭섭한 연말 알림 그 잡채. 속을 데워주는 이 달달하고 고소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거리를 멍하니 바라본다. ‘아니, 뭘 했다고 또…’ 올해 역시 달콤하기만 하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앉아서 이거 마실 여유는 있구나 싶다. 평소에는 잘 가지도 않으면서 12월만 되면 홀리듯 스벅으로 향하는 이유다.
9년 전에도 토피넛 라떼를 마셨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똑같이 한숨 쉬었다. 달라진 거라곤 더 이상 스타벅스가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 다른 스페셜티 커피 매장에 비하면 별로 안 비싸다 생각하는 거? 8년 전에도, 5년 전에도, 작년 연말에도 토피넛 라떼를 먹었던 것 같다. 안 먹었어도 벽에 적힌 메뉴들을 보며 ‘벌써 연말이네’ 혼잣말했다는 데 오백 원 건다. 내 20대의 겨울을 논할 때 토피넛 라떼를 빼면 서운하다.
역대 최장수 시즌 음료.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에 처음 출시해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이 무려 3000만 잔이다. 한 메뉴를 20년 동안 팔았다. 그동안 나는 9년 간의 추억을 쌓았고, 누군가는 15년, 또 누군가는 3년의 추억을 알게 모르게 이 한 잔에 담았지. 중요한 건 그 경험과 기억을 충분히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는 단체로 찾은 할아버지들부터 엄마는 신경도 안 쓰고 신나게 노는 미취학 아동까지 섞여 있는 곳이니까. 작년에 온 사람과 어제 온 사람이 같은 메뉴를 먹을 수 있으니까. 매년 연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토피넛 라떼가 일면식도 없는 우리 사이의 연결고리가 된다. 힙스터들 다 모여 있다는 성수동 모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를 두고 아빠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툭 하면 새로운 게 나온다. 짓고 부수고, 개발하고 테스트하고 폐기하고.. 그놈의 팝업스토어는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찍먹스토어들이 점거한 거리를 걷다 보면 여기가 내가 작년에 왔던 데가 맞나 싶어지지. 트렌드라는 실체 없는 아우성은 메뉴도 제품도 공간도 도저히 지속할 수 없게 만든다. (“지속가능성”은 패션이 된 지 오래다.) 이 시대에 연례행사라 부를만 한 경험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반복은 정체로, 익숙함은 고리타분함으로 너무 쉽게 치환되는데. 힙과 핫과 혁신과 성장도 좋지만 추억 부자가 되고 싶은 나는 갈수록 올드 패션드가 땡긴다. ‘잊을만 하면 돌아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툭 하면 새로운 걸 보여주겠다면서 잊혀지기도 전에 증발해버린 브랜드도 다 이유가 있을 테지만.
나는 내 이야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 콘텐츠가 좋다. 고작 토피넛 라떼 한 잔이 그렇다.
(근데 20년째 하는 것도 다 돈이 있어서 가능하지 싶은 것이다… 애초에 같은 걸 꾸준히, 성실히 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가 너무 강려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