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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김 Nov 01. 2020

늦은 감사

 그날은 유난히 밝았다. 떨어지는 햇볕이 모든 것을 또렷하게 비추었다. 그녀의 유순한 눈꼬리도. 카페에서 나온 우리는 나무 그늘을 따라 손잡으며 걸었다. 걸을수록 나는 앞서갔고 그녀는 뒤처졌다.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 차고 또 차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 보였다.     


“나, 명진 씨한테 할 말 있는데. 명진 씨가 안 좋아할 말.”     

 내가 안 좋아할 말이라. 여느 때처럼 같이 시간을 보내며 말하지 않고 서로 집에 가야 할 때 해야 하는 말. 싸늘했다. 마음 한구석에 차디찬 물이 차오르는 듯했다. 차고 또 차서 내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질 것만 같았다. 굳어지려던 표정을 다시 부여잡고 내가 안 좋아할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차에 가면 말해준다며 방향을 바꿨다.   

  

 차 안. 안 좋아할 말은 내게 치명적일 것이다. 아물기까지 오래 걸릴 상처. 아물어도 꺼내 보면 다시 아파질 상처. 말을 꺼내면 곧이어 일이 닥칠 거라는 생각에 우리는 침묵했다. 미룰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잠깐이라도 붙들고 싶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했다. 아까 먹었던 밥 이야기. 대답을 곧장 해주며 가볍게 대화를 이어 나가다 다시 정적. 그녀는 이번에도 숨을 골랐다. 다음 말을 할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그녀가 꺼내든 편지.    


"차마 말로 할 수 없었어."     

 내게 편지로 전해져야 하는 말은 결국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4년 6개월이다. 그녀와 만난 시간.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왜 그녀를 흔들리게 뒀을까. 30살 넘어가고 친한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는데 자기만 혼자 덜렁 남아있다는 외로움. 나는 그걸 보지 못했다. 그녀의 외로움을 알아주지 못했다. 확신을 준다고 졸업 후에 결혼하자고 했지만, 그걸로 충분했을까. 아니었다. 그녀에게 와 닿지 않은 나의 말은 편지로 돌아왔다.     


 눈이 떨리는 걸 진정시킬 수 없어 꼭 감았다. 붙잡을까? 아니, 감히 잡을 수 없었다. 헤어지면 안 된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결혼을 의논하자고 할 수 없었다. 편지에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 그동안 괴로웠을 그녀의 감정이 너무 무거웠다. 목을 타고 넘어갈 수 없어 글자로 탄생해야 했던 감정들. 그 무게에 짓눌려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내 손 위에 손을 얹었다. 부르르 눈을 뜨며 그녀를 봤다. 그녀의 눈은 젖어있었다.   

  

"알았어. 우리 헤어지자. 내가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     

 마지막 매듭을 짓고 우리 둘은 부둥켜안아 울었다. 많이 사랑했다고, 좋아했다고, 같이 있어 행복했다고, 미안하다고, 앞으로 행복하게 지내라고 마지막 남겨진 시간에 모든 걸 쏟아냈다.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 내가 지켜주지 못한 뒷모습.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눈에 고인 눈물에 자꾸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다. 고맙다는 말. 그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와 같이 있기 힘들었을 텐데 겨우 견디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청난 무게를 버텨줘서 고맙다는 말.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짧게 하려고 한다.     



그해 여름,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를 같이 보내고 내게 전해진 작은 편지 


목에서 넘어져 나오지 못한 말, 

종이에 패여 글로 나와야 했던 말


‘이제 엇갈려 가자’ 

깊어서, 깊어서 눈을 감았습니다


심연, 그 안에서 고요해야 했던 마음 

손등에 얹힌 그녀의 체온에 눈을 뜹니다


담아낸 가슴이 무거워 흔들리는 눈동자

그 속에 혼자 감당해야 했던 그녀의 시간 


얼마나 버텨왔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구르는 눈물로 답변했습니다

그리고 안아주며 각자 마음을 맺었습니다


그때 하지 못한 감사를 지금 합니다

그런 눈을 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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