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까지가 트라우마고 추억일까, 그 경계를 잘 모르겠다.
진술을 다녀왔다. 여러가지로 준비했지만 부족해서 추가로 진술을 해야하여 그 사이 서면이 몇 번 더 들어 갔고... 내 사례를 아카이빙을 하는데 있어 무엇을 어떻게 기록해야 좋을지 고민하느라 쓰는 일이 늦어졌다. 사실을 기록하되 간략하고 축약적으로 기록하기로 했다.
11월 19일 화요일, 첫번째 진술
변호사님을 처음 만났다. 나는 겨울을 맞아 도진 디스크 때문에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었다. 그냥 손이 조금 시려웠던 기억이 나고 가만히 안에 들어 가 이건 왜 저건 왜 사건이 되고 안 되는지를 들었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진술을 하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대로 사건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여 경제적인 부분은 민사 소송으로 진행하라는 경찰에 말에 변호사가 널 위해 그러는 것이다, 라고 하여...
그냥 그렇게 진행하기로 하였다. 왜? 라는 의문은 잘 풀리지 않았지만 나를 위하는 거라고 해서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조금 더 법률이 친절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사례 분석이나 판례 분석, 인용 등의 작업은 할 줄 아는데 막상 내 앞에 놓인 사건이 어떻게 어떤 조건으로 해당 항목에 부합하는 가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게 살짝 억울했다.
그 이후부터 12월 중순무렵
이후의 진행 과정에서 담당 변호사와 커뮤니케이션이 원만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또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토만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도 시키는대로 꾸역꾸역 자료를 보내주었지만 이 자료가 담당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답장이 영원히 오지 않고 서면에도 첨부 되지 않는 등 이해 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 됐다. 이에 그냥 다 포기하고 죽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살짝 억울한 마음에 '이런 세상 따위 다 망해버려!'라고 하고 협회에 메일을 길게 썼는데 12월 3일, 메일을 다 쓰자 비상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라 그냥 죽고 다 관두고 싶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협회의 운영위원회 2분이 나를 만나주셨다. 내 상황을 듣고 적절한 조취를 취해주셨고 지금 이 사건은 정상적으로 진행 중에 있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아주 나중에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필요한 현실적인 제도 개선 방안에 대한 소결을 내며 정리하려고 한다.
감정적인것 보다는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싶다.
24년과 25년의 경계, 지금
이렇게 정갈하게 진행 될 수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일이 차분히 진행 되고 있다. 이제는 '내가 겪은 가정폭력'을 너머 '우리가 겪은 가정폭력'이 되었다. 동생이 가정폭력 피해자로 합류하면서 사건이 조금 더 명료해 질 수 있게 됐다. 동생이 어렸을 적부터 겪었던 일들을 들으며 '우리는 분명히 같은 공간에 살았는데 활동하는 시간이 엇갈린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서로의 고통을 몰랐다고?'라는 생각을 했다.
동생은 방치 되었고 둘째 동생에게 드라마틱하게 맞고 욕설을 들었으며 이것을 부모에게 알려도 부모는 둘째에게 더 패버리라고 했다. 동생에게 틱 장애가 발현 됐을 때도 부모는 동생이 장난 치는 것이라고 했고 내가 정신과를 권했을 때 엄마라는 사람은 "너는 내 아들을 정신병자로 만들면 좋니?"라고 말했다. 그 말에는 '우리 집에서 정신병자는 너 하나로 족해.'라는 말이 숨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에, 알고보니 제가 혼외자였습니다
가정폭력을 처리하다가 알게 된 사실은... 내가 혼외자였다는 것이다. 아빠는 85년도에 이OO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86년에 남자아이인 윤강O씨를 낳았다. 윤강O은 친척 큰 오빠와 이름이 2글자나 같아서 내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줬던 걸까? 나는 이 이름과 그 밑의 윤OO 이름의 차이를 느낌적으로 알았다. 윤강O는 친가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지만 윤OO은 친가에서 '허락할 이름'이 아니라는 걸.
하여 후에 알게 된 사실, 친척 언니의 말로는 윤강O의 이름은 친할아버지가 지어 준 것이라고 했다. 아, 이 말을 듣자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그리고 윤OO의 존재는 친가에서도 고모 몇 분만 아는 일이었고 나머지는 몰랐다, 라는 걸 듣고서는 어째서인지 울컥해서 울것 같았다. 왜냐하면 윤OO씨는 나보다 1년 정도 먼저 태어났다. 개월 수로 따지면 8-9개월 정도 차이.
끔찍하게 징그러웠다.
나의 존재가, 부모가.
'계피씨, 나는요. 할 수만 있다면 내 몸의 피를 다 뽑고 싶어요.'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 게 떠올랐고 11월 말일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꿈 속에서 팔을 긁는다. 그러다가 굳은 살이 떨어져 나가듯이 살이 뜯겨 나간다. 이후에 내 팔에는 붉은 반점이 가득한... 염증이 가득찬 살갗 사이사이 드러난 흰 뼈와 초록색 혈관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방사능이라도 흐르는 걸까, 할 정도로 형광색으로 빛나는 그 색을 보면서도 나는 팔을 긁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그렇게 꿈에서 깬다.
어떻게 엄마는 그 동안 불륜 드라마를 보며 정신나간 년놈들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걸까. 자신이 파괴한 한 여자와 두 아이의 인생은 생각하지도 않고서. 해 맑게 웃으며.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걸까. 듣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진실일리가 없다. 나는 이제 모든 걸 포기했어, 너희에 대해서는.
아빠만 대기업에 다닌 것도 아닌데, 친척들이 다 우리 집에 돈을 빌려 달라고 할 사람들이 아닌데 나는 그렇게 알고 컷다. 그렇게 듣고 컷다. 늘 친척 집에 갈 때면 새 옷을 사 입었다. 말투를 바꾸고 성적을 높여 말하고 꿈은 내가 되고 싶거나 관심도 없는 것을 말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친척 언니에게 양아치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창 유행하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양아치였기 때문이다. 언니는 별거 아니네, 하고 내 머리를 쓸어 주며 좋은 양아치가 되라고 해줬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모든 것들이 계산 된 것이라고 말했다.
덕분에 지금은 그렇게 되었다. 이미 다 커버린 상태로 이 이런 이야기를 해 봤자 내가 계산하고 접근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느껴질터이니, 그러니... 당신이 예언한대로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서 많이 슬프고 쓸쓸하다. 어린 시절 내가 살려달라고 말했으면... 누군가는 나를 구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이상하다. 뭐, 돌아 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다시 말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들은 괴물이었다.
엄마는 정말 북한 군이 괴물인 줄 알았어.
빨갛게 그림을 그려서 보여줬거든.
응, 엄마. 나도 친척들이 괴물인 줄 알았어.
엄마가 괴물처럼 말하고 묘사해서. 하지만 아니더라.
나도 남들처럼 친척들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당신들이 그걸 앗아갔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퍼.
부모는 내 앞으로 빚을 만들어 자신들의 삶을 살았다. 그 돈을 내게 썼든 동생들에게 썼든 그건 자신들이 감당해야 하는 몫을 내게 전가했다. 그리고 이걸 해결 해 달라고 하자 내게 줘야 할 돈을 주지 않고 사과를 종용했다. '사과하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을거야. 네가 어쩔건데?'라는 태도. 내가 울며 사과할 뻔 할 때마다 친구들이, 그리고 동생이 잡아줬다. 네 잘못이 아니야. 정신차려. 사과하면 안 돼. 맞서야 할 때야, 라고.
그때마다 들려오는 건 "누나 소식을 전하면 너랑도 연을 끊겠다"라는 관계를 이용한 협박을 동생에게 하는 부모와 "네가 어른이면 늙은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양 쪽 말을 다 들어야지!"라고 말하는 둘째. 아쉽게도 막내는 중재를 하며 양쪽의 말과 입장을 모두 다 들었다. 내가 모든 걸 보여줬고 답장하기 전에 막내와 상의했으니까. 둘째? 철저하게 내 연락을 무시하고 받지 않았다. 나보고 철이 없다고 했다.
처참한 기분이었다.
내 연봉에 비해... 터무니 없는 한도의 신용카드 채무를 리볼빙하여 신용점수를 나락으로 보낸 뒤에는 한도를 다 써서 신용카드를 못 쓰는 걸 내 탓으로 돌렸다. 그렇게 말하며 내게 죄책감을 심어 줬고 또 불안을 조장했다. "네가 내게 잘 보이지 않으면 나는 우리가 갚아야 하는 돈을 네게 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닥치고 내 말대로 해."라는... 말을 나는 20살 초반부터 들으며 자라왔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런 줄 알았다. 원래 부모는 말이 통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에는 늘 반대하고, 용돈을 달라고 조르고, 말도 안 되는 물건이 갖고 싶다며 심술을 부리고... 그러면서도 내가 아프거나 하면 가끔은 다정하게 굴면서 가족애를 과시하는 그런 존재니까. 이 모든 것이 그냥 가족이라서 그러는 줄 알았다. 한국 부모의 특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스라이팅이었고 또 나르시스트인 모친의... 그냥 그런 이야기다.
https://www.kukinews.com/interactive/Debt/
요즘은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있다.
어디부터가 내 추억이고 어디부터가 트라우마인지 모르겠다. 나는 자주 투명해진다. 자주 없다. 원래 공기였던 것처럼 존재라는 형체가 희미한데 선생님은 그것이 트라우마의 최종장과 가까운 것이라고 하셨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내 형체가 느껴지지 않는다. 앞이 보이니까 눈이 있구나... 키보드를 두들길 때마다 손 끝에 닿는 통증에 가까운 감각, 그리고 귀를 따갑게 울리는 키보드의 동그랗게 말랑한 소음, 등받이와 등 사이에 드는 희미한 열감과 동시에 칼날이 내 등을 한 겹씩 벗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 감각들 때문에 있음은 알지만...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볼 때마다 내가 낯설다. 어딘가에 가서도 이런 이야기를 해 본적이 별로 없다. 나는 텅 비어 있는 것이 편하다. 그게 스위치가 잘 변하니까.
지금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 지금은 소설을 쓰는 사람...
이런 식으로 변경하기 쉬우니까. 그러니까... 그게 편한데.
괜찮다는 감각은 뭘까.
살아도 좋을 생의 기쁨이라는 것은 뭘까.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내가 죽음을 갈망하는 만큼 나는 살고 싶다...
안정되고 싶고 안정된 사랑을 주고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어디까지가 내 기억의 추억일까. 그 경계를 잘 모르겠다. 마음이 많이 아프다. 얼른 정리되면 좋겠다. 안정되면 좋겠다. 2024년 다이어리를 넘겨 봤을 때 슬프지만 찬란한 해였다고 기억 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어서, 훌쩍 흘렀으면 좋겠다. 지금 아픈 것들에 얼른 둔감해져서 웃으며 술 안주로 꺼낼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이런 걸 쓰면서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아, 그렇네.
나 또 살아서 새 해를 맞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