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안에는 셀프 빨래방이 있다
처음 동유럽 여행을 계획할 당시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가려고 했다. 하지만 항공편 등 복잡한 사정으로 폴란드를 제외하게 됐고 그 자리를 어느 나라로 메꿀까 고민하다 크로아티아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다. J의 부모님이 2024년에 크로아티아를 다녀오셨고 두브로브니크 성벽 투어 중 찍은 사진을 J에게 보여줬는데 이 풍경에 반한 J는 언젠가 두브로브니크를 꼭 가보리라 결심했다. 마침 P의 여행 위시리스트 중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이 있어 크로아티아로 합의했다. 이후 크로아티아 일정을 짜다 보니 플리트비체 국립공원과 두브로브니크는 꽤 떨어진 지역이었고 이동 시간도 자연히 길었다. 그리하여 크로아티아는 여행 마지막 나라이자 전체 일정의 약 40%를 차지하게 되었다.
둘은 프라하에서 크로아티아 스플리트라는 도시로 항공편을 이용해서 이동했다. 여행지 중 가장 북쪽이었던 나라에서 가장 남쪽인 나라로 이동하게 되어 육로 이동은 시간과 육체적으로 무리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체코 에어라인 계열의 저가 항공을 이용했다.
* 참고: 체코에서 크로아티아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은 이전 발행글에 있습니다.
오후 2시가 약간 넘은 시간에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공항에 도착했다. 착륙하자마자 역시나 손뼉 치는 승객들. 둘도 같이 호응했다. 아무래도 이런 건 같이 하면 재밌으니까.
이 날은 전체 여행 중 가장 더웠던 날이다. 33도에다가 땡볕이 내리쬐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게다가 뇌우 경보는 또 무슨 말인가. (다행히 실제로는 뇌우가 오지 않았다.)
짐 찾고 나오니 어느덧 2시 35분이다. 아침 식사는 대충 했고, 이후 뭔가 마시지도 먹지도 못해서 배고프고 목말랐다. 저가 항공이니 식사는 물론 음료수 서비스도 없다. 물론 돈을 내면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있었지만 돈 아낀다며 참았는데 그때야 냉방 잘 된 비행기 안이었으니 참을만했던 것이고 이제는 더운 날씨 속에 있자니 견디기 힘들었다. 숙소라도 빨리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공항버스를 눈앞에서 놓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스플리트 공항은 몇 년 전 리모델링을 했다더니 새로 지은 느낌이 나고 깨끗했다. 하지만 시설이 너무 없었다. 편의점처럼 보이는 곳에 가보았으나 물은 고사하고 음료수도 없었고 아이스크림과 과자만 있었다. 비행기에서 옆에 앉은 소녀는 샌드위치를 포장해 와서 먹던데 그렇게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또한 비행기 탑승 전에 공항에서 물을 샀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긴 기다림 끝에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빨리 체크인해서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문제는 이날 묵을 숙소에 대한 부정적 후기가 '찾기 너무 어렵다'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찾기 좀 어려웠다. 나름 구글 지도 안내를 따라 목적지까지는 잘 왔지만 정확히 둘이 묵을 곳이 어디인지를 찾기 어려웠다.
덕분에(?) 스플리트 거리 풍경을 좀 보게 됐는데 대체로 건물이 아이보리와 베이지 사이 어딘가에 있는 그런 톤이다. 이동 중간에 아파트도 봤는데 해가 너무 쨍한 도시라 그런지 창문에 블라인드, 가림막, 커튼 등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가려둔 상태였다.
우여곡절 끝에 체크인을 하고 들어간 숙소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방이 작아서인지 싱글 침대 두 개가 ㄴ자로 배치된 희한한 구조였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사실 둘에게는 이 방에 작은 냉장고와 에어컨이 있다는 점이 기뻤다. 게다가 각종 처치를 할 수 있는 구급함도 있는 것이 놀라웠다.
두 사람은 스플리트를 그저 경유지로 생각했기에 여행지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지 않았다. 스플리트는 해안 교통의 요지 같은 곳이어서 큰 항구가 있고,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 있으며, 서쪽 해안가에서 일몰을 보기 좋다 정도만 알고 왔다. 이 중 궁전 정도만 시간이 되면 가볼까 고려 중이었다. 숙소와 궁전이 제법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 J의 가장 큰 고민이었던 빨래 문제를 해결해 줄 셀프 세탁소가 그 궁전 안에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크로아티아의 세계유산 중 하나라는 궁전에 상업시설이, 게다가 그게 세탁소라니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좋은 기회라고 둘은 생각했다. 빨래를 돌리면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할 테니 그때 궁전을 돌아보자 계획했고 빨랫감을 챙겨 나왔다. 빈 중앙역에서 유로 동전이 필요해서 급히 샀던 장바구니가 여기서는 빨래바구니가 되었다.
궁전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게 된 점. 궁전이 맞긴 맞는데 궁전 속에 문화재, 상업시설, 심지어 거주 공간까지 섞여있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특색을 가진 장소였다. 그 덕분에 세탁소도 존재할 수 있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유럽사에 있어서 중요한 곳인지 유독 단체 관광객이 많았다. 학생 무리도 많았고, 중남미에서 온 종교 단체인듯한 일행들도 보였다.
아무튼 둘에게는 세탁물이라는 짐이 있으므로 궁전을 보기 전 이걸 해결해야 했다. 바로 세탁소로 향했다. 세탁소는 생각보다 찾기 쉬웠고 바로 앞에 멕시코 음식과 각종 음료를 파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왼쪽 사진에 보면 교환기가 있는데 5유로를 넣으면 토큰 1개가 나오는 방식이다. 코스를 선택하고 토큰을 넣으면 되는데 세탁에 2 토큰, 건조에 1 토큰이었다. 우선 세탁을 돌렸더니 40여분 걸린다고 표시됐다. 예정대로 근방을 돌아다니다 오기로 했다.
궁전 내에는 유독 젤라또 가게가 많았다. 세탁소에서 골목 하나 돌아서자마자 하나 있었고, 그 외 곳곳에 여러 젤라또 가게가 있었다. 에너지 충전 겸 경험도 해볼 겸해서 J와 P 역시 젤라또를 먹으며 궁전을 돌아다녔다.
골목이 묘하게 이어져서 지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녀도 좋았다. 지하로 연결되는 곳도 있었는데 그 부분은 동굴처럼 시원하여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반대편에 나가는 곳이 있어 출구까지 접근해 보니 바닷가-정확히는 항구로 연결됐다. 참 신기한 곳이다. 궁전 내에 식당도 아이스크림 가게도 카페도 세탁소도 있고 항구까지 연결도 되다니.
세탁 종료 예정 시간 십여 분을 앞두고 지도를 들여다보다 stray cats gathering이라는 장소명을 보았다. 세탁소와 멀지 않아 거기까지만 가보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 장소의 정체는 작은 공원이었는데 처음에는 비둘기와 갈매기 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자세히 보니 벤치 아래, 그늘 아래, 나무속에 등등 고양이들이 쉬고 있었다.
아니 정말로 이런 귀여운 애들이 이렇게 모여있는 장소가 있다니~! 아마도 밥과 물을 챙겨주는 분이 있는지 그릇들도 곳곳에 있었다.
세탁소로 돌아가니 세탁이 끝나있었다. 건조 코스를 돌렸는데 세탁보다 더 오래 걸린다. 돌아다닐 만큼 돌아다녔고 더위에 지치기도 하여 세탁소 바로 앞에 있던 멕시칸 음식점에서 나초와 맥주를 주문해서 시간을 보냈다. 아마 이 음식점은 세탁소 이용 고객 덕에 장사가 잘 될 것이다. 둘 외에 다른 사람도 세탁을 돌리고 이 식당에 와서 음료를 주문하곤 했다.
스플리트에 도착하기 전에는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빨래도 하고 궁전도 돌아보고 귀여운 고양이들도 보고 의외로 할 건 다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플리트비체를 향해 먼 길을 가야 하니 세탁만 끝나면 숙소에서 푸욱 쉬기로 했다. 숙소에 냉장고가 있으니 숙소 근처 슈퍼에서 시원한 물과 음료수도 사고.
문제는 날씨 예보였다. 할슈타트에서 체스키크룸로프를 갈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Thunderstorm 예보가 있었다. 심지어 플리트비체는 국립공원이라는 특성상 비를 맞고라도 돌아다녀야 할 상황인데 말이다. 날씨에 대한 걱정과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는 부담이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당겼는지 둘은 쉽사리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