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요정

수상할 정도로 날씨 운이 좋은 두 사람

by 김연큰

여행을 다니면 인간의 계획이란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계획을 무력화하거나 방해하는 대표적인 것이 날씨다. 인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예보가 빗나가기도 한다. 특히 일주일 이상의 장기 여행을 계획한다면 날씨가 항상 좋을 수는 없음을 생각해야 하고, 여행지에서 날씨가 나쁘다 해도 그저 운이 좋지 않은 것일 뿐이며 날씨는 계속 변하니까 다시 좋아질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 낫다.


둘 또한 그런 점을 각오했다. 만약 악천후를 만나면 그날 여행은 접을 생각도 했다. 여행 짐을 쌀 때 우의나 우산을 챙기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적당한 비면 맞고 다니고, 영 아니다 싶으면 그냥 그날 여행은 숙소에서 쉬는 날로 생각하기로 한 것. 물론 그런 날이어도 밥은 먹어야 하기에 혹시 숙소에서 우산을 빌릴 수 있다면 그걸 이용하고 아니면 맛집 여부와 상관없이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 크로아티아에 오기 전까지 신기할 정도로 날씨 운이 좋았다. 물론 폭염을 만나서 힘든 면도 있었지만 대부분 맑은 날을 만난 덕에 풍경이 마치 관광 홍보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예뻐 보였다.




그간 거친 도시들을 잠시 되돌아보면-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세체니 다리와 세체니 온천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경우 계속 맑았다. 물론 밤에는 사실 비가 와도 크게 상관없다. 유람선이 못 다닐 정도의 악천후가 아닌 이상에야. 다만 비가 왔다면 저렇게 달이 예쁘게 뜬 줄 몰랐을 것이다.


세체니 온천은 특히 날씨 덕을 보았다. 비가 왔다면 야외 온천에서 즐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렇게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는 멋진 곳인지 몰랐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 카를 성당과 페스트조일레 동상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내내 맑았다. 구름도 거의 없었기에 맑다 못해 쨍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더위로 힘들었지만 그늘은 시원했고 무엇보다 쇤브룬 궁전에서 정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꽃, 나무, 분수 등 정원의 모든 게 아름다웠다.


빈에서 특히 햇빛이 강해서 좋았던 부분은 슈테판 광장에 있는 페스트조일레 동상을 보면서였다. 성삼위일체 동상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동상은 페스트의 종식을 기념하고자 만든 동상이라고 한다. 맑은 날 오후 해가 서쪽에 있을 때 이 동상을 보면 상단 금색 부분이 햇빛을 받아 엄청나게 반짝인다. 클림트의 <키스>보다 더욱 빛나는 금빛이었고 새파란 하늘 덕에 더욱 대조적으로 보였다.

체코 프라하

체코 프라하에서는 구름이 약간 있는 정도의 적당한 맑은 날씨였다. 덕분에 구름이 가끔 햇빛을 약화시켰고 그래서 빈보다는 돌아다니기 좋았다. 그리고 그 덕에 운치 있는 노을을 이틀 연속 본 점은 행운이었다. 다만 그 문제의 YMCA는 좀....................




따지고 보면, 도시는 나름 비가 와도 괜찮다. 비를 피할 곳도 많고 박물관, 미술관 등 일정을 대체할 것도 많다. 문제는 야외 활동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는 곳을 갈 때인데, 이럴 때 신기할 정도로 날씨 운이 따랐다.


방문 순으로 소개하면 첫 순번은 오스트리아 할슈타트가 되겠다. J가 여행 전부터 제발 여기만은 날씨가 좋아야 한다고 빌고 또 빌었던 곳. 아무래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햇빛은 매우 강했고 당연히 더웠다. 오후 들어서는 큰 구름도 등장하긴 했지만 더위를 가려주지는 못했다. 체감 온도로는 여기 도착한 날과 크로아티아 스플리트가 가장 더웠는데 역설적으로 그런 더위 덕에 수영하기 좋았다. 수영하는 곳은 오후에 그늘이 져서 물이 차가웠고 물 밖으로 나가기 싫을 정도로 즐거웠다.


다음날 오후, 할슈타트에는 폭풍우 예보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3일간! 폭풍우가 오기 전의 찜통더위였나 싶기도 한데, J의 소원대로 맑은 날씨를 보았고 수영은 수영대로 즐겼으니 이런 행운이 있을까 싶다.


그다음은 체코의 체스키크룸로프. 여기는 할슈타트와 반대로 P가 날씨가 좋기를 바란 곳이었다. 2-3시간이면 다 보는 곳이라지만 그래도 기왕 숙박까지 하기로 결심한 곳이니 날씨가 좋았으면 했던 것. 그러나 체스키에는 폭풍우 예보가 있었다.


체스키로 가는 도중에 실제로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기도 했으나 도착할 무렵에는 이슬비 수준으로 잦아들었고 숙소 체크인 후 나왔을 때는 놀랍게도 완벽히 날이 개어 파란 하늘이 '나 찾았어?' 하는 듯이 둘을 맞이했다. 파란 하늘 아래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마을. P는 이 풍경에 매우 감동했고 기대 이상 만족했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P는 체스키의 야경을 보면서 낮과 다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맘에 들었고 다음날 비가 오면 좋겠다고 했다.

같은 장소, 다른 날씨

그런데 정말로 새벽부터 비가 왔다. 둘이 가장 신기해한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오후 1시경에 버스 터미널을 향해 캐리어를 끌고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밖에 나가 비 오는 체스키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다. 그런데 브런치를 먹고 나오니 비가 개어 이동할 때는 다시 햇빛이 쨍한 날씨가 되었다.


이쯤 되면 둘은 날씨 요정 아닌가 싶다. 아니 날씨 요정은 통상 맑은 날씨를 불러오는 존재로 통용하므로 비까지 부른 점에서 날씨 마법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크룸로프 성에서 본 장미. 비에 젖은 모습이 싱그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다시 크로아티아로 돌아왔다. 이제 스플리트에서 플리트비체로 가야 한다.


그런데 날씨 예보가 심상치 않다. 할슈타트에서 체스키로 갈 때처럼 폭풍우 예보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동유럽 전반적으로 이날부터 2-3일간 비가 온다고 했고 이후 폭염이 사그라드는 것으로 예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날부터 2-3일'은 두 사람의 일정으로 따지면 플리트비체에서의 2일과 두브로브니크에서의 1일인데 혹여 2일로 줄어든다고 해도 플리트비체에서의 2일은 반드시 포함된다.


플리트비체는 국립공원이라는 특성상 야외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 맑은 날의 플리트비체를 보고 싶긴 하지만 비를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적은 양의 비는 그래도 괜찮지만 움직일 수조차 없을 폭풍우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플리트비체에 생돈을 날리고 오는 것인가? 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좌) 창가에 폭우 상태가 보인다. (우) 플리트비체의 우의 일행

걱정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버스가 휴게소에서 잠시 쉴 때 이미 하늘 상태가 심상치 않았고, 휴게소를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둥번개가 치고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플리트비체에서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체스키에서 비 오는 오전에 입었던 바람막이를 다시 챙겼다. 약한 비에는 이걸 입으면 그래도 방수가 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히 도착할 때가 되자 비 양이 좀 줄었다. 여전히 비는 오고 있으며 하늘은 구름이 덮여 어둑했지만 돌아다닐 수는 있다는 뜻이다. 그럼 최악의 상황은 면할 듯하다. 숙소로 가는 길에 국립공원에서 나온 많은 사람들이 우의를 입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도착 시간이 오전 11시를 약간 넘긴 시간이어서 우선 점심을 먹고 호텔에 체크인하러 가기로 했다. 비가 열기를 식혔는지 플리트비체는 그동안 겪은 날씨에 비하면 싸늘했고 바람막이를 입어도 좀 춥다고 느꼈다. 둘이 들어간 식당은 이케아 레스토랑처럼 식판을 들고 일방통행으로 지나면서 원하는 음식을 골라 가져가고 마지막에 결제하는 방식이었는데 마침 음식 중 따끈한 고기 수프가 있었다. 이 녀석이 추위를 녹여줬다.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전날까지 폭염으로 그 고생을 해놓고 이제 와서 춥다니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짐을 맡기러 갔는데 그 호텔에서는 두 사람이 숙박객임을 확인하자마자 짐을 보관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관람 코스에 대한 친절하고 자세한 안내를 해줬다. 그리고 지금 비가 오니까 우산이나 우비를 챙기라는 조언을 받았다. 우산과 우비는 호텔 내 기념품샵에서 살 수 있는데 독점 판매여서 그런지 몰라도 가격이 저렴하진 않았다.


사실 계속 비가 온다면 우비는 입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P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날씨 앱을 통해 플리트비체의 시간별 날씨를 조회해 보니 오후 1~2시쯤 날이 갠다는 예보가 있었고 이걸 믿고 그냥 가기로 했다. J도 그 의견에 순순히 따랐다. 둘은 바람막이 후드를 뒤집어쓴 채 공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호텔은 고지대에 있었고 공원으로 들어가려면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내리막길로 들어가기 전, 저 멀리 푸른 하늘이 살짝 보였다. 어쩌면 일기예보대로 조금만 있으면 비가 갤 것 같다는 희망이 보였다.


꿈은 이루어진다?!

예보는 찐이었다! 점점 개이더니 엄청 맑은 날씨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12시 20분경부터 비가 그쳤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12시 50분경부터는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으며

1시 20분 무렵부터는 구름이 물러나고 완연히 맑은 날씨가 되었다!

이후 둘이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을 돌아다니는 동안은 비가 오지 않았다.


앞서 확인했던 2~3일간 비가 온다는 예보는 틀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7시쯤 비가 세차게 쏟아졌고 그 빗소리에 둘은 눈을 떴다. 하지만 이번 비는 길지 않았다. 8시 무렵부터 비가 그치고 햇살이 눈부시게 숙소 방안을 비추었다. 둘은 오전 9시쯤 체크아웃하고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버스를 탈 예정이었는데 이동 시간에 맞춰 또다시 날씨가 좋아졌다.


이쯤 되어 두 사람은 깨달았다. 2~3일간 비 예보라는 것은 그 기간 중 일부 시간대에 비가 올 수 있다는 것이지 24시간 내내 주야장천 내리는 것은 아니라는 걸.


두브로브니크행 버스를 탑승하고서 날씨를 확인해 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하지만 오후 4시 이후 맑은 상태가 예상된다고 해서 이번에도 이것이 맞기를 빌기로 했다. 전날에도 그 덕을 보지 않았던가?

두브로브니크에서도 따라준 날씨 운

두브로브니크에는 저녁 9시경 도착했는데 그전부터 이미 비는 그쳤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플리트비체에 가기 전에 접한 예보대로 폭염이 가라앉아 이후 크로아티아 여행은 맑은데도 30도를 넘지 않는 쾌적한 날씨 속에 보내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날씨 운이 좋을 수 있던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다. 갑작스레 정한 동유럽 여행이었지만 이런 날씨가 따라올 운명임을 예상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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