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쉼 그리고 조심

프라하 둘째 날을 대충 보낸 사연

by 김연큰
경계
1. [境界]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나누어지는 한계
2. [警戒] 뜻밖의 사고나 잘못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여 단속함


P는 여행지에서 7박 이상을 하는 경우 중간에 최소 하루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회사를 다녀도 주 5일제인데(물론 주 5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임을 알고 있다.) 여행도 일주일에 한 번은 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노는 것이 목적이라지만 낯선 곳이다 보니 알게 모르게 긴장하게 되고, 평소보다 체력을 많이 사용하게 되니 최소 하루는 호캉스 하듯이 편히 쉬는 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라하에 온 첫날, 야경을 보고 호텔에 돌아온 후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왔다. 원인이 뭘까? 인파에 시달린 것도 있고, 정체 모를 쎄-한 느낌에 긴장한 탓도 있었다. 또한 프라하에 도착한 날은 여행 온 지 정확히 7일째였다. 일주일 동안 쉼 없이 여행한 것이다.


"내일 오후나 스플리트에서 반나절이라도 쉬는 게 어때?"

"갑자기 왜?"

"오전에 프라하 성 보고 저녁에 유람선 타는 거 외에는 내일 별 일정 없잖아. 모레도 스플리트로 이동하는 거 말고는 딱히 뭐가 없고. 우리 한국 떠난 후로 제대로 쉰 적이 없어. 피곤할 때가 됐기도 하고."

"흐음..."

"이럴 때 쉬지 않으면 크로아티아에서 뻗을 걸?"

"흐으음......"


P가 말한 대로 다음 날 오후는 일정을 비워도 된다는 걸 J도 안다. GPT가 추천한 유대인지구는 어차피 둘에게 큰 매력은 없는 곳이니까. 사실 J는 일주일 간 쌓인 빨래가 걱정이었다. 원래 프라하에서 알아본 세탁소가 있었으나 평이 괜찮은 곳은 하필 다음 날인 일요일이 휴무였다. 그렇기에 P의 제안대로 쉬어도 되지만 P의 제안이 단순 '쉬어야 하는 타이밍'이라서가 아닌 다른 이유도 섞여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또렷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다음 날. 8시에 프라하 성으로 출발하기로 했었건만, 정작 J가 8시 다 될 때까지 일어나질 못했다. P는 제때 일어났지만 J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때다 싶어서 늘어지고 빈둥댔다.


뒤늦게 눈 뜬 J는 정작 본인이 피로가 쌓였는데 여행의 즐거움에 인지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본래 예정보다 늦은 시간에 프라하 성을 가게 됐지만 잠을 푹 잤으니 그걸로 됐다.




오전 9시 반 무렵에 숙소에서 나왔다. 22번 트램을 타고 프라하 성을 향했고 Pražský hrad 정류장에서 하차하니 바로 길 건너편이 프라하 성이었다.


프라하 성은 규모가 꽤 컸다. 입장권을 사러 갔는데 줄이 길어 우선 J가 줄을 서고 P가 입장권 가격표를 사진으로 찍어오기로 했다. 입장권 종류가 다양했는데 어느 걸 사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친절하게 한국어 안내도 있었지만 - 번역서를 본 사람이 한 번쯤 해봤을 경험, 한국어인데 뭔 말인지 모르겠는 그런 상황에 빠졌다.

한국어 안내가 있는 건 좋은데 입장권 종류는 영어로 보는 편이 이해가 빨랐다.

이럴 땐 영어 안내를 같이 보자 싶어서 영어도 추가로 찍어서 검토하여 Main circuit 티켓을 구입하기로 했다. 재밌는 점은 오디오 가이드를 아시아권에는 한국어만 유일하게 제공하고 있는데 정말 체코에 한국인 많이 오나 보다 싶다. 하지만 둘은 오디오 가이드는 생략하기로 했다.


메인 서킷 티켓은 성 비투스 성당 - 구 왕궁 - 성 조지 대성당 - 황금소로 순으로 보게 되고, 이름 그대로 핵심적이고 유명한 곳은 다 본다고 볼 수 있다.


성 비투스 성당은 규모가 굉장히 크고 성당 지붕 꼭대기가 매우 높았다. 다리 건너편에서 프라하 성을 봤을 때 가장 높이 솟아있던 지붕이 성 비투스 성당이라는 건 이때 깨달았다. 가까이에서는 0.5배 줌을 하지 않으면 성당 전체를 찍을 수도 없었다. 웅장함에 압도된 한편 강하게 매료되었다.


성당을 여러 곳 방문하다 보면 겉에서는 커 보여도 막상 안에 들어가면 관람 범위가 좁은 경우가 있는데 성 비투스 대성당은 내부도 크고 넓었다. 일부 공사 중이었음에도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볼거리가 있었다. 중간에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마주쳐 몇 가지 설명은 살짝 들어보기도 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 반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 내부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조형물과 건축 양식도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이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이었다. 마침 맑은 날씨 덕에 본 것이겠지만 햇살이 창문을 통해 반사된 빛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저절로 경건해지는 마음이 들 정도로.


대성당을 나와 구 왕궁으로 이동하는 길에는 너른 광장이 있는데 길쭉하게 솟은 오벨리스크가 있었다. 그 앞에서 사진도 찍고 광장 구경을 잠시 하고서 구 왕궁으로 들어갔다. 구 왕궁은 부다성과 비슷한 녹회색 계열의 탑이 솟아있고 지붕 타일도 비슷한 색깔로 맞춰져 있었다. 다만 타일이 보다 회색 계열에 가까워서 탑이 더 돋보였다.

생각보다 재밌었던 구 왕궁

구글 지도에서 이곳에 대해 찾아보면 후기 고딕 양식 궁전으로, 르네상스풍의 요소와 왕실 행사를 개최한 블라디슬라브 홀(왼쪽 사진)이 돋보인다고 설명이 있고, 리뷰에는 아무래도 비투스 대성당에 밀려 볼거리가 적게 느껴진다는 말이 있지만 둘에게는 여기가 오히려 매우 인상적이고 재밌었다.


특히 각 문양이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고 자꾸 들여다보게 됐다. 벽 높은 곳 혹은 천장에 있어 목이 아파서 하나하나 세세히 보기는 어려웠지만.


우측 사진에 있는 책들도 궁금했는데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몰라 아쉬웠다. 이럴 땐 오디오 가이드가 필요하긴 한데. 아마도 체코 역사에 대해 안다면 더 즐겁게 볼 수 있을 듯하다.


궁을 나와 성 조지 대성당에 가는 길에 잠시 스타벅스에 들려봤다. 음료를 마시려는 목적은 아니었고 프라하 성에 스타벅스가 있다는 말을 들어 도대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였다. 매장 자체는 평범했지만 위치 선정이 정말 독특하다고 느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경복궁 안에 스타벅스가 있는 셈 아닌가.


성 조지 대성당은 쉬기 좋다.

성 조지 대성당은 크게 인상적인 부분은 없으나 의자 덕에 시원한 실내에서 쉬다 갈 수 있는 쉼터가 되었다. 의자에 앉아 옆, 천장, 앞, 뒤를 찬찬히 볼 수 있는 경험이 좋았다.


황금소로는 민속촌 같은 느낌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실제 생활공간을 볼 수 있는데 참 좁고 낮은 곳에서도 이렇게들 살아왔구나 싶다. 침대 길이를 보니 여기 사람들도 과거에는 키가 작았구나 싶고.

황금소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화이트 타워

그렇게 별생각 없이 둘러보다가 둘의 이목을 끈 곳이 있으니 바로 DEFFENSE CORRIDOR라는 곳이었다.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면 중세의 방어구, 무기, 의복 등을 구경할 수 있는데 영화나 게임 등에서 보았던 것들을 실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둘에게 매우 흥미로운 곳이었다. 비늘 갑옷과 사슬 갑옷을 실제로 볼 거라고 언제 생각해 봤겠는가. 심지어 위 중앙 사진과 같이 어떤 장인이 활을 직접 만드는 풍경도 볼 수 있었다.


프라하성 샛길 전망대(Vyhlídka Na Opyši)

황금소로까지 보고 나오면 내려가는 방향의 계단을 걷게 되는데 사람들이 잔뜩 몰린 곳이 보였다. 호기심에 다가가 까치발을 들고 사람들 틈으로 보니 엄청나게 멋진 전망대였다. 좁은 공간에 비해 사람이 많아 앞사람들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기다린 보람이 있는 전망을 보게 됐다.


전망대에서 파노라마 영상을 찍어봤다.

다만 다시금 SNS의 해악을 생각하게 됐다. 단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숏츠 영상을 찍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대기가 길어졌고, 심한 경우 주변을 통제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이런 경험은 할슈타트에서도 있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여행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전시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을까?


전망대 감상 후 성에서 볼 건 다 봤으니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J가 미리 봐둔 곳이었는데 프라하 성 입구 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해서 지금까지 온 곳을 다시 돌아갈 참이었다. 그때 문득 P의 직감이 발동했다. 전망대 옆에 SOUTH GARDENS라는 표지판이 있었는데 이 정원을 통해 나가면 될 거 같다는 촉이 온 것.

프라하 성 남쪽 정원

여기는 관광객들이 별로 찾지 않는 곳인지 매우 한적했다. 그래서 J는 살짝 불안해했지만 P는 정체 모를 자신감에 차있었다. 꽃, 나무, 담 너머 전망까지 여러 풍경을 감상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갖가지 색상의 수국이 절정이라 눈 호강하기 좋았다. 게다가 나무 그늘이 많아 중간중간 시원하게 갈 수 있었다.


P의 직감대로 정원의 끝에는 출구가 있었고 그쪽으로 나가니 식당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행운은 거기까지. 식당은 이미 만석이어서 갈 수 없었다. 대신 근방에서 적당히 좋아 보이는 곳에서 오리 요리와 리소토를 먹었다.




프라하 전망을 보는 목적으로 페트린이라는 곳을 많이들 가는 모양이었다. 둘도 그쪽을 가보기로 했다. 이것저것 구경할 겸 걸어가 보기로 했다. 마침 성에서 내리막길로 간다는 것도 걷기로 결정한 요인이기도 했다.

페트린으로 가는 길에 재밌는 볼거리가 많았다.

가는 길에 레넌 벽이라는 것이 있다고 해서 살짝 구경해 봤다. 전쟁 반대, 평화의 메시지가 가득하다는데 화려하고 멋져서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이 많았다. 이윽고 페트린으로 올라가는 푸니쿨라를 타는 곳에 도착했는데 이럴 수가?!

저 노란 줄 뭡니까 ㅠㅠ

푸니쿨라는 임시 폐쇄 상태였고 걸어 올라가야 했다.........


둘은 고민했다. 걸어갈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미 프라하 성에서 멋진 전망을 보았기에 기왕 이리된 거 숙소에서 낮잠이나 자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나오기로 한 것. J도 이 날 아침에 늦잠을 자면서 본인도 피로가 쌓였음을 인지하게 된 덕분이다.


그렇게 숙소에 들어가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J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제대로 피로가 터진 모양이다. 원기 회복을 위해 저녁은 정말 먹고 싶은 걸 먹기로 했다. 숙소 근처에 있는 필스너우르켈 직영점을 가보기로 한 것.


원래는 타르타르라는, 체코식 육회를 먹으려고 했는데 주문할 때 실수로 치즈-프로슈토햄 샐러드와 스테이크를 주문해 버렸다. 하지만 얼라려? 여태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었다. 게다가 맥주 파는 곳에서 파는 음식이다 보니 맥주와 잘 어울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너무나 맛있었던 저녁 식사

이미 배부르게 먹었지만 타르타르에 미련이 남은 J는 맥주를 한 잔 추가로 주문하면서 혹시 타르타르를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다행히 가능하다고 했고 기다림 끝에 만난 타르타르는 너무도 맛있었다. 한국인이 해외에 오래 있다 보면 마늘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는데 무려 생마늘을 준다. 이것을 빵에 갈아서 마늘빵을 만들고 육회를 곁들여 먹는 것인데 체코에서 먹은 것 중, 아니 이 여행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맛있었다!


이후 둘은 유람선을 탔고 그렇게 프라하 여행이 사실상 끝났다. 다음 날 아침에 둘은 크로아티아로 이동해야 했기에.




사실 맘먹으면 더 볼 시간이 있던 프라하에서 굳이 낮에 쉬는 것을 택한 것은 피로가 쌓인 것을 인지한 것도 있지만 프라하 곳곳에 있던 그 CANNABIS 샵의 정체를 알게 된 것에 대한 경계도 있었다.


프라하에 도착한 날부터 P는 묘한 두려움이 있었다. 분명 사람들이 친절한데 뭔가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처음에는 구 시가지에서 과한 인파를 만나고 북적한 곳들을 돌아다녀서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느낀 것인가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길거리에서 본 뭔가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이 자꾸 맘에 걸렸다. J는 '프라하가 통계상으로는 도쿄보다 안전하다더라'며 달랬지만 P는 뭔가 계속 불안해 보였다.


그날 밤 P는 CANNABIS SHOP에 대해 검색했고, 주체코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게시한 공지사항을 보게 됐다. 그리고 알게 됐다. CANNABIS란 대마 성분의 일종이라는 것을.


주체코 대한민국 대사관이 2023년 1월에 게시한 "체코 내 마약(대마) 관련 유의사항 공지"
구글맵에서 찾아본 대마초 판매점과 가게 입구 사진

그것을 깨닫고 나니 P는 등골이 살짝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대마초가 합법인 나라에서 대마 성분이 들어간 음식을 먹을 경우 대마 성분이 들어간 걸 모르고 먹은 것이라 해도 귀국 후 처벌받을 수 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내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대마를 먹고 있거나 피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대마를 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P는 성격이 대범하고 뭔가 잘 저지르기도 하는 편이지만 대한민국에서 금지하는 걸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P가 생각할 때 대마를 피하는 건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돌아다니면서 조심하는 것과, 숙소에서 쉬는 것. 그중 쉼을 택함으로써 피로도 풀고 불안에서도 회피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체코 맥주와 음식이 매우 본인 취향이었던 J는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더 오고 싶다고 했지만, P는 대마에 대한 두려움에 프라하는 다시 오고 싶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프라하 성은 예쁘고 맘에 들었지만 프라하에 대해 좋은 건 딱 그 프라하 성과 타르타르뿐이라며.




덧붙임. 체코에서 대마초는 합법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여행 당시는 일부 합법이었다. 그리고 2025년까지는 그러하다.


약학정보원 약물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있다.

체코에서는 의사 처방에 따른 의료용 대마 사용이 가능하며, THC 함량이 1% 이하인 제품(오일, 젤리, 화장품 등)은 합법적으로 유통되고 있음.
향정신성 효과가 가장 큰 물질은 THC로서, THC를 많이 함유한 대마초일수록 인체에 미치는 위험성이 크다. THC는 특정 뇌세포 수용체에 작용하여 뇌의 일부분을 지나치게 활성화시킴으로써 환각작용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조금 더 조사하다가 25년 7월 16일에 나온 체코의 대마초 합법화 뉴스를 접하게 됐다. 내년(2026년) 1월부터 합법화된 셈으로, 체코 여행 시 보다 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25071615460008


이 영향인지 25년 8월 6일, 주체코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새로이 공지를 게시했다. 정확히는 YTN 보도를 인용한 것이나 널리 알리기 위해 게시한 듯하다.

* 공지: 체코 여행 시 마약 함유 제품 섭취·구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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