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란 재밌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뭘 해도 답답하고 힘들면 왜 그리 점 같은 걸 보고 싶은지. 2년 간 회사에서 뭘 해도 안 풀려서 답답했던 나는 2024년 말에 사주를 보러 갔었다. 내 느낌에 타로는 뭔가 끼워 맞추기 같고, 사주는 그래도 나름 빅데이터 같아 상대적으로 신빙성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꽤 잘 본다더라 하는 두 곳을 추천받아 두 군데 모두 보았는데, 그때 느낀 건 이건 결국 해석의 영역이라는 것이었다. 분명 같은 글자를 두고 풀이하는데 두 군데가 묘하게 달랐다. 그리고 내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것은 결국 '지금보다 앞날이 나아진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거였다는 것도 깨달았다. 지난 2년이 힘들었다는 말이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그리고 다가올 대운이 그렇게 좋다나. 다만 바뀐 해에 바로 좋은 건 아니고 그로부터 2-3년 정도 지나야 한다는 말은 공통적으로 들었다. 한편 무척이나 퇴사하고 싶었던 그때에 두 군데 모두 '25년과 26년은 회사에서 인정받고 바쁘고 일 복이 많을 거다'라는 말을 하는 건 다소 좌절스러웠다.
이직이라도 해서 바빠지려나 했는데 딱히 맘에 드는 공고도 없었다. 이제 슬슬 '다른 일'을 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무슨 일을 하지? 내가 회사라는 곳에 소속되지 않을 때 오랜 기간 끈기 있게 어쩌면 평생 할 수 있을 일이 무엇일까?
문득, 몇 년 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중학교 동창 친구가 생각났다. 서로 안부를 묻고 근황 토크를 하다가 나는 IT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 친구가 무척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에? 나는 네가 당연히 ***를 할 줄 알았는데?!"
당시에는 그 친구가 나를 그 분야에 재능 있는 사람으로 봤다는 게 의아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다른 일'을 고민하던 시점에 갑자기 그때 일이 떠오르고 그 분야 공부를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 나는 조직 이동을 했는데 그 조직은 맡은 일만 제대로 책임지면 근태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칼퇴 후 공부할 생각으로 강의를 알아보고 등록했다. 강의는 주 2회 2달간 진행되었고 그 정도면 내가 이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 앞으로 평생 할만한지 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늠은 가능하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두 달을 수강해 본 결과,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재능 있다는 소리도 들었고, 무엇보다 재밌었다. 그걸 할 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냉정히 말해 내가 이것으로 생활비라도 벌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책도 있지 않던가? 뭐라도 도전해보지 않으면 계속 회사를 다녀야 할 터였다. '언젠가 직장인을 그만두겠다' 결심을 한 이후로 나름 1년은 버틸 수 있는 비상금도 모아 놨겠다, 1년은 죽기 살기로 도전하자 결심했다.
사주에서 말하는 '회사에서의 인정'은 이제 필요 없다. 내 마음은 이미 떴다. 정말로 인정받는다 한들 나의 직장인 기간만 늘어나고 다른 일을 준비할 시간은 점점 줄어들 게 뻔했다. 회사는 그러하다. 일 잘하는 사람에게 일을 계속 준다. 실제로 25년에 들어서며 새로운 업무에서 인정받고 있었고 조직장 님을 스리슬쩍 떠보니 내 업무는 점점 늘어날 상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정받으니 오히려 떠날 결심을 굳히게 됐다. 그래도 이렇게 좋을 때 끝내는 편이 낫다고, 직장인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다만 시기를 봐야 했다. 일단 코 앞으로 다가온 연말정산은 회사를 통해 받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그럼 그 결과가 나오는 2월까지는 다녀야 한다. 그러다 보면 3월이나 4월에 평가 결과가 나오고 연봉 협상 결과가 나온다. 그러고 보니 4월에는 건강보험료 정산이 있다. 이것까지는 하는 게 맞을 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3, 4월에 연협 결과가 나오면 면담을 할 테니 그때 퇴사 의사를 밝히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장 입장에서 "저랑 면담 좀 할 수 있을까요?"라는 말이 제일 무섭다고 들었다. 대개 퇴사나 조직 이동 등 이별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아서. 당시 몸 담았던 조직에는 일이나 사람이나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없었고 오히려 그 회사에서 있었던 조직 중 가장 괜찮은 축이었다. 사람 하나 나가는 게 회사 입장에서는 별 거 아닐지 몰라도 조직 입장에서는 민감한 일이니 내가 불리는 자리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재직하는 동안은 내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마무리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이윽고 그날이 왔다. 평가 결과를 알려주고 연봉 협상(실상 통보라고 하지만)이 있는 날. 한 회의실에 불려 갔고 그냥 무덤덤하게 결과를 들었다. 회사 성과에 비해 개개인의 인상률은 턱없이 낮아 대부분의 직원들이 강력히 항의를 했는데, 내 경우는 지나칠 정도로 아무 반응도 없어 조직장 님은 나에게 뭔가 싸함을 느낀 거 같았다. 조심스럽게 나에게 이의 신청을 할 생각이 있는지, 다른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아, 네. 사실은 저 퇴사하려고 합니다."
조직장 님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다. 하기사 퇴사하는 날까지 직장인으로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가겠다는 생각으로 열일하고 있었으니 눈치를 챘다면 이상한 것이긴 했다. 왜 나가려는 것이냐, 이직하는 곳이 있느냐 등을 물었다.
"이직할 곳은 없습니다. 그냥 직장인을 그만하려는 것이고, 업계와 상관없는 다른 일을 할 겁니다. 그래서 퇴사일은 아직 고려한 게 없고 인수인계 완료될 때까지는 있을 수 있습니다."
퇴사 사유조차 낯선 것이었는지 조직장 님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선 알겠으며, 구체적인 건 다음에 얘기해 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만 더 묻자고, 무슨 일을 하려는 거냐고 물었다.
"가족들에게도 비밀에 부친 일이라서...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업계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가족들에게도 비밀에 부친 일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딱 한 명만 알고 있었다. 나의 새로운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면 그때 가족들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업계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은 '유사 업종으로 창업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을 긋는 나름의 표현이었다. 물론 조직장 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알겠다며 일단 그 자리는 파했다.
퇴사할 때까지 회사 내 그 누구에게도 내가 무슨 일을 할 거라는 건 말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에게, 나에게 관심이 없다지만, 이상하게 어떤 집단에서는 누군가의 가십을 소비하는 걸 즐긴다는 걸 알았고 경험상 그 집단 중 하나가 회사였다. 난 내가 사라진 후 내 이야기가 도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