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고 바쁜 퇴사 직전

마지막 출근일까지 끝내야 한다

by 김연큰

조직장 님께 퇴사 의사를 밝히기 몇 달 전부터 나는 '받을 건 받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조직과 업무에 만족했지만 그와 별개로 시간이 지날수록 직원을 홀대하는 회사에 유감이 많았다. 그 홀대라는 것은 금전적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입사했던 시기와 퇴사를 결심하던 시기를 비교해 보면 휴식과 관련된 복지는 점차 줄이고 근태 시스템에는 직원을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능을 지속적으로 도입하며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처럼 변해갔던 것. 이에 복지 제도를 이용하든 업무 지원 제도를 이용하든 아무튼 내가 정당하게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대한 취하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얻어낸 세 가지에 대해 아래 소개한다. 퇴사 전 가장 잘한 일로 생각하는 것들이자 다른 분들도 퇴사를 고려할 때 (만약 저런 제도를 제공하는 회사라면) 고려해 볼 사항이라 생각한다.




구형 노트북 매입


회사는 직원이 근속한 지 만 3년이 되면 사용하던 장비(데스크톱 PC 혹은 노트북)를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줬다. 만약 장비 교체 신청을 할 경우 기존에 사용하던 장비를 시장가 대비 꽤 저렴한 가격에 본인이 매입할 수 있었다. 나는 만 3년을 채운 지 오래였지만 장비가 아직 쌩쌩하고 쓸만하다고 생각해서 바꾸지 않고 있었다. 장비를 교체한 후 프로그램을 다시 설치하고 이런저런 설정을 다시 하는 과정이 귀찮아서 방치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내적으로 퇴사 의지를 다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 노트북이라도 받아가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퇴사 후 내가 할 일을 고려할 때 실직적으로 필요하기도 했고.


장비 교체 과정은 심적으로 매우 '쫄렸다'. 교체 신청 전에 장비 교체 프로세스와 기존 장비 매입 방법을 읽어보니 퇴사 예정인 사람은 매입이 불가하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럼 나는 최소한 이 프로세스가 끝날 때까지는 퇴사 의사를 밝히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한편 퇴사 의사를 밝히기 전에 이 생각을 해서 무척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나는 입사할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Windows OS가 설치된 데스크톱 PC와 Apple사의 맥북을 받았다. 내 장비 신청을 담당한 분이 임의로 그렇게 한 것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잘됐다 생각이 들었다. 업무에서 맥북 사용성은 다소 떨어졌다. 특히 문서 작성이나 회의실에서 장비 연결할 때는 Windows OS가 설치된 기기가 더 편하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업무상 맥북의 사용성이 떨어져 윈도 노트북으로 변경하고자 한다."는 사유로 조직장 승인을 받았고 가장 빨리 받을 수 있는 노트북을 요청하여 일주일 만에 받을 수 있었다.


다만 기존 장비를 매입하는 과정은 시간이 좀 걸렸다. 총무팀 입장에서는 전사에서 장비 구입 의사를 밝힌 사람을 관리해야 했기에 월 단위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알려준 계좌로 정해진 날까지 계좌 이체를 해야 했고 모든 것이 확인이 완료된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 작업은 총 두 달 가까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내심 조마조마했던, 그렇지만 절대 티를 낼 수 없었던 나는 모든 데이터를 삭제한 맥북을 다시 받고 나서야 긴장의 끈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맥북은 현재 글 쓰는 용도로 잘 사용하고 있다.




건강검진


회사에서 제공하는 복지 중 체감상 가장 좋은 복지가 건강검진이었다. 수십 만 원어치에 준하는 검진을 본인에게는 무료로 매년 지원해 주니까. 내 경우 직장인을 그만하기로 결심하고 나서 가장 아쉬운 게 이것이기도 했다. 나이 먹을수록 건강검진에서 무언가 추가 검진이 필요한 소견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게 사실이니 앞으로 건강 관리를 꼼꼼하게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덤으로 들었다.


퇴사하기 전 마지막 건강검진이니 안 해본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와 계약된 패키지 검진은 기본 검진에 더해 두 가지 선택 검진을 옵션으로 추가할 수 있었다. 내 경우 하나는 위 내시경을 고정으로 하고 다른 하나는 매년 부위마다 돌아가며 초음파 검사를 선택하곤 했다. 예를 들면 한 번은 심장 초음파를 하고, 그다음 검진 때는 경동맥 초음파를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초음파 대신 대장 내시경을 하겠다 마음먹었다. 약 10년 전쯤에 호기심에 대장 내시경을 하면서 물과 약을 먹는 고통에 혼쭐이 나서 다시는 하지 않았으나 이것으로 화려한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건강검진은 빨라야 3월에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보통 3월 중순 이후 신청할 수 있었고 대장 내시경을 포함할 경우 빠르게 하려면 월요일 혹은 금요일과 같이 인기 있는 요일은 포기해야 했다. 나는 요일은 상관없으니 최대한 빨리 하고 싶었지만 3월 중순이 되도록 건강검진 신청하라는 공지가 뜨지 않았다. 하필 이번 연도에 오픈이 늦어질 게 뭐람. 4월 초가 되어서야 건강검진 신청이 가능했는데 늘 검진하던 곳을 선택하고 옵션에 위 내시경과 대장 내시경을 넣었는데, 아니 이럴 수가?!


가장 빠르게 가능한 일정이 8월이다.


이건 곤란하다. 나는 8월까지 회사 다닐 생각이 없는데. 최대한 빨리 할 걸 끝내고 빠르게 퇴사하고 싶은데 8월이라니 무슨 날벼락인가?


차선으로 다른 병원을 택했는데 가장 빠른 일정이 7월이었다. 일단 그걸 신청해 두고 고민했다. 7월까지 다녀야 하는가? 일단 신청하면 퇴사는 말해도 되지만 무슨 수로 7월까지 재직할 수 있으려나? 아예 퇴사를 6월쯤 말해야 하려나?


그러다 아예 다른 곳을 알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신규로 입점한 검진센터가 있었다. 집에서 방문하기에도 괜찮은 위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5월 7일, 어린이날 대체 휴일 다음날에 검사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생긴 곳이라 사람들이 신청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건강에 대해서는 검증된 곳에서 하려는 경향이 있으니까.


검증된 곳이 아니라는 것 외에 다른 리스크도 있었다. 연휴 다음날 건강검진을 한다는 건 연휴 때 맛있는 걸 먹는 건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입장은 찬 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가장 빠르게 할 수 있길 원했고 그게 5월 초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후일담. 내 대장은 아주 깨끗하고 모범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동안 대장 내시경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퇴직금 관리


회사에서는 개인형퇴직연금(IRP)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회사와 연결된 세 개의 금융사 중 하나를 본인이 선택하여 IRP 계좌를 개설하면 회사에서 매달 일정 금액의 퇴직금을 입금했고 그 돈으로 내가 직접 투자할 수 있었다. 나는 예금과 같은 안정적 상품에 70%, ETF나 펀드 같은 공격적 상품에 30%를 투자하면서 꽤 짭짤한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퇴사를 결심한 이후 공격적 상품에 투자했던 것을 모두 매도하고 안정적 상품으로 변경했다. 언제까지 내가 직접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지를 잘 몰랐기에 적절히 이득 보았을 때 돈을 묶어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퇴사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해당 퇴직금을 받을 IRP 계좌를 생성하기 전까지는 투자할 수 있었다. 즉 나는 다소 성급하게 돈을 묶어둔 셈이었지만 시기를 볼 때 오히려 잘된 것이었다. 나의 공격적 투자 대상은 미국 증시였는데 25년 초에 그 투자상품들을 매도했다. 이후 4월에 미국 증시가 크게 출렁였다. 약간 빠르게 대응한 덕에 그간 얻었던 수익을 잘 지킨 셈이니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연금저축 CMA나 퇴직연금 IRP 운용 방식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글에서 보다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인수인계의 중요성


세 가지 이야기는 끝났지만 하나만 더 보태고자 한다.


'받을 건 받는'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내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 퇴사 직전까지 열심히 한 게 있으니 바로 인수인계다. 인수인계를 철저히 해서 퇴사 후 나에게 연락올 일이 없게 하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업무 절차에 대한 매뉴얼을 작성할 때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단계별 안내를 상세히 했고 프로그램이나 툴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는 스크린샷을 풍부하게 넣어 '못할 수가 없게끔' 했다.


마지막 출근일까지 '이 정도면 된 것 같다'는 안도와 '아직도 남은 것 같은데'라는 불안이 공존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또한 실제로 퇴사 후 연락이 온 적은 아직 없다.


참고. 가끔 SNS 등에서 보면 퇴사 전 문서를 다 삭제하고 나겠다는 발언이나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철없는 행동이 아니라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 (업무방해죄 등에 해당될 수 있음 - 참고 링크) 아무리 회사나 조직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해도 인수인계는 확실히 해두고 나가는 것이 그 누구가 아닌 본인 스스로를 위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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