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면 바로 건강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요
병원을 가보기로 결정한 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첫 번째는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월급이 아직 들어와서 그나마 돈 걱정 덜 할 수 있을 때 점검을 해보자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퇴직하고 2~3주가 지나고 나니 몸 여기저기서 이상 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제 회사 일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내 할 일을 준비해 보자!' 모드에 진입했을 뿐인데 왜 여기도 이상하고 저기도 이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예전에 SNS에서 봤던 '투쟁-도피 상태' 글이 생각났다. 투쟁-도피 상태는 신체와 정신이 갑작스러운 위협이나 스트레스 상황에 맞서 싸울지(투쟁) 또는 도망칠지(도피)를 결정하도록 준비하는 급성 스트레스 반응이다. 문명사회 이전에는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래서 자주 발동되는 상태가 아니었으나, 문명사회에 들어선 이후에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잦은 빈도로 정신적 위협이 발생하는 탓에 시도 때도 없이 발동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이 끝난 뒤에 오히려 몸이 아픈 현상을 한 번쯤 겪어봤을 거라 생각한다.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 대한 예를 들면 큰 시험을 대비하거나 중요한 프로젝트를 담당한 경우, 혹은 오랜 기간 과로를 하고 있던 상황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는 '투쟁-도피 상태'가 지속적으로 발동되는데 코르티솔, 아드레날린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여 신체를 비상 상태로 유지하게 된다고 한다. 즉 일이 고되어 수면도 부족하고 운동도 못하는데 이상하게 멀쩡하다? 이런 경우가 신체 비상 상태에 돌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그 상황이 종료되면 긴장 상태가 풀리면서 그동안 억눌려 있는 피로와 염증 반응을 느끼게 된다. 특히 코르티솔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바이러스나 세균에 대한 방어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는데 이로 인해 그동안 잠복해 있던 질병들이 한꺼번에 몰려올 수 있다고 한다.
* 참고 1: 태어날 때부터 셋업 된 ‘투쟁-도피 및 적응 반응’ (메드월드)
https://www.medworld.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3528
* 참고 2: 스트레스 반응 제대로 알기 - 스트레스 반응의 다양한 측면 (정신의학신문)
http://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2805
* 참고 3: 코티솔의 두 얼굴 (일산병원)
https://www.nhimc.or.kr/ilsan_news/Hello_2019_Autumn/html/sub01_04.html
어쩌면 내가 이런 상태인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며 병원을 방문했다. 여러 과를 방문했는데 그중 두 에피소드를 다뤄보려고 한다.
퇴사 직후에는 회사 다닐 때와 다를 바 없이 늘 일어나던 시간에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회사를 다니던 수년 동안 그 시간대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이미 몸에 밴 지 오래인 생활 리듬인데 어찌 그게 하루아침에 깨지겠는가. 심지어 내 경우는 잠이 좀 없는 편이라 주말에도 오전 8시를 넘겨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피곤해서 주말에 잠을 열 시간 이상 잔다는 사람을 보면 내심 부럽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자려고 해도 안되던데.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 버렸다. 퇴사하고 2~3주쯤 지나니 갑자기 잠을 과하게 자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9시간 이상 잤다. 잠도 매우 깊게 잔 모양이었다. 가족 말로는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그리고 죽은 듯이 잤다고 했다.
처음에는 '나도 이럴 수 있네'하며 신기했지만 이런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점차 당혹감이 밀려왔다. 보는 사람은 차마 깨우지 못할 정도로 푹 자는 듯 보인다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았다. 저녁에 일찍 잠이 드는 것도 아니었고 완전 잘 자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저녁에 별로 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잠이 들고, 자다가 2~3번은 깼던 거 같다. 그러다가 새벽 5시가 넘어가면 그때부터 깊은 잠이 들어 9시쯤 일어났다. 게다가 9시간 이상 잤으면 개운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피곤하고 정신이 몽롱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정신과를 찾았다. 회사 다닐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지금은 어떤지를 소상히 설명했다. 결론부터 언급하면 큰 일은 아니었다. 회사 다닐 때 과도한 긴장 상태로 오랜 시간을 지냈고 지금은 그 긴장에서 벗어나 회복하는 단계에 있었다. 워낙 오랜 시간 동안 긴장된 상태였기에 그만큼 시간도 오래 걸리는 것이니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면 원래의 수면 패턴이 돌아올 것이라 했다.
그 말은 맞았다. 수면 시간은 서서히 줄어들어 퇴사하고 한 달 반 정도 지났을 때 원래대로 돌아왔다. 퇴사하고 2~3주 정도 지날 때부터 과수면 상태에 들어갔으니 정상 수면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 달 정도 걸린 셈이었다.
오른쪽 아래 어금니가 있는 곳의 가장 안쪽, 그러니까 과거에 사랑니가 있던 부분의 잇몸이 쑤셨다. 사랑니는 매우 오래전에 뺐는데 왜 이쪽 잇몸이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전에도 스트레스가 과하면 자주 욱신거렸던 부분이긴 하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려다 오른쪽으로 씹기 어려울 정도의 통증이 발생하며 치과를 찾게 됐다.
그 치과는 과잉진료를 하지 않고 설명을 잘해주기로 유명한 곳이고 나도 다닌 지 5년이 넘은 곳이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긴 시간 동안 진료 대기를 해야 했지만 그날 별 일정이 없던 나에게는 문제가 없었다. 이럴 때 멍 때리기나 해 보자며 대기실에 있는 티브이에서 나오는 뉴스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다 호명되어 '어? 생각보다 빠른데?' 했는데 그냥 엑스레이를 찍는 것뿐이었다. 다시 지루한 대기 시간을 보낸 후에야 진료가 시작됐다.
선생님께서는 내 증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지난 진료 때-그러니까 2년 전에 찍은 엑스레이와 이번에 찍은 엑스레이를 비교하며 살펴보셨다. 그런데 선생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내가 봐도 엑스레이에 뭔가 다른 게 보이긴 했는데 심각한 건가 싶었다. 그러다 선생님이 무겁게 입을 뗐다.
"대체 지난 2년간 무슨 일이 있었어요?"
지난 2년간...? 회사에서 많이 힘들긴 했는데 왜 그러시나 싶었다.
"2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빨이 많이 상했어요. 이건 거의 치아를 혹사시킨 수준이에요. (오른쪽 아래 어금니 쪽을 가리키며) 여기 보이시죠? 여기 튀어나온 게 치석인데 이건 사실 스케일링할 때 제거할 수 없는 치석이에요. 일단 오늘은 이걸 제거해 볼 거고요. 그런데 이건 큰 문제가 아니에요. 가장 심각한 건 마지막 어금니예요. 보면 마지막 어금니에 금이 갔고요. 이 금이 어느 정도 깊이인지는 알 수 없어요. 잇몸이 아프다는 걸 봐서는 깊게 금이 가서 그 영향으로 아픈 것일 수 있어요. 천만다행으로 오늘 치석을 제거한 후 통증이 나아지면 금이 간 것 때문은 아닐 수 있지만 치석을 제거하고도 아프다면 신경치료를 받아야 할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 어금니뿐 아니라 지금 아래 어금니가 전반적으로 다 안 좋아요. 마모가 많이 됐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멍했다. 내가 내 이빨을 그렇게 괴롭혔다고? 게다가 신경치료를 받아야 할 수 있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집에 돌아온 후 곰곰이 생각해 봤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나름 양치질도 열심히 하고 치실도 열심히 하고 가글도 열심히 하고 그래서 건강검진 때마다 치아 관리 잘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번쩍임을 느꼈다. 회사에서 화를 참아야만 하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무는 습관이 생겼었다. 이건 약 1년 전부터 인지하긴 했었다. 그런데 그걸 내가 생각한 것보다 자주 행했고 강도도 셌나 보다. 이 습관은 언제 어쩌다 생겼으며 왜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게 된 걸까?
하지만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윗니와 아랫니를 붙이지 않도록 일부러 '어-'라고 발음한 상태로 있어보았다. 이빨 상태를 의식하다 보니 특히 뭔가 긴장된 상황에서 집중해야 할 때 이를 악 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깨달은 건 어느 순간 턱이 아파서였는데 턱이 아픈 이유를 관찰하다 보니 저런 공통점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이후 긴장 상황이 되면 치아부터 신경 썼다. 집중하다가 이를 악 물고 있는 걸 깨달으면 바로 풀고 껌이라도 씹으려고 했다.
병원을 찾아가게 만든 통증의 경우 치석도 원인이었고 금이 간 이빨도 원인이었던 듯하다. 치석 제거 후 통증이 없어진 듯 느껴졌으나 얼마 후 재발했다. 병원에서는 신경치료를 하면 당장의 고통을 완화하는 것일 뿐 그 치아는 죽은 치아가 되어 수명이 짧아지므로 정말 못 견딜 통증이 되지 않는 한 치료를 미루는 걸 권했다. 다행히 지금은 상태가 호전되어 일단은 버틸 수 있을 듯하다.
결론적으로 정신과도, 치과도 모두 과도한 긴장과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투쟁-도피 상태'가 장기간 지속된 탓도 맞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긴장과 스트레스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잘 해소하는 방법과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내가 어떤 대응을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스트레스로 인해 내가 내 몸을 혹사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인지하기 어렵다. 나 역시 병원 방문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누군가 봐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자세히 볼 수 있는 사람이 흔치 않고 설사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들도 잘 모를 수 있다.
나는 선생님께 혼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런 점에서 조금 몸이 이상하면 미루지 않고 병원을 가는 것이 가장 현실적으로 좋은 대처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아플 땐 쉬는 것이 가장 좋지만 쉽지 않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 지금도 '잘 쉬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고 느낀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이 사건들을 계기로 몸이 아프면 '일단 병원으로 가기'를 실천하기로 했다. 불편한 곳이 있고 그 증세가 여러 날동안 반복된다면 꼭 병원을 가는 것으로!